Ingrid’s Adoption Story – Calgary, Alberta, 1960


잉그리드의 입양 이야기-캘거리 알버타(Calgary, Alberta), 1960

 우리는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다.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그들은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나에게서 바로 빼앗아갔다.

나는 14년 전 내 딸과 재회를 했고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세 아이의 할머니가 되었다. 내 딸은 크랜부르크(Cranbrook)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까지 4번 방문을 했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쓰고 전화통화를 한다. 우리는 훌륭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내 딸을 찾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뒤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50년대 말, 60년 대 초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몇은 대부분의 어린 미혼모들이 아기에 관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어린 미혼모들이 해야 하는 그 선택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선택권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 아기를 기르는 것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으로 없었으며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에 대해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의 의도는 부정적으로 혹은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아이를 포기했었어야만 했는지, 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몇몇의 입양아들은 어머니들이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느낀다. 나는 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분노는 여성들이 임신을 했을 때 거의 어떤 선택도 주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적 태도가 만연했던 시대로 향해야 한다. 많은 생모들 대부분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의 분노, 수치, 죄책감의 근본을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위한 길이다.

클라리사 핀콜라 에스트(Clarissa Pinkola Este)늑대들과 달리는 여자(Women Who Run With the Wolves)”라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여자들의 인생을 억압하는 것 들 중에서 가장 이야기 되지 않았던 것은 북미를 포함한 전세계에 있는 미혼모에 관한 것이다. 이 미혼모들은 이 한 세기 동안에만 문화적 관습에 의해 그들의 상태 혹은 그들의 아이들을 숨기도록, 심지어는 그들의 자식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난 받고 영향력을 박탈당한 시민으로서의 반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몇 세대 동안 여자들은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합법적인 인간이 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남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해왔다.”

이 인용문은 중세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이것은 20~30년 전 시대에 팽배했던 일반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여자를 소유했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아이를 소유했다. 만약 여자가 남자 이름의 허가 없이 임신을 했다면 그녀는 사회로부터 비난 받았고 아이는 합법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만 사회의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이도 같이 받은 것이다. 여자와 아이는 사회의 버림받은 자, 즉 고상하지 못한 피해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다. 더 심한 단어로 하면 창녀와 사생아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십대였을 때 나는 이 사고방식에 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관습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그런 방식이었다. 만약 여자가 규율을 어겼다면 그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복도에서 6개월 혹은 1년 간 비밀리 사라진 여자아이들에 관한 수군거림을 기억한다. “그 애는 임신했어.” “애를 낳으러 떠난 거야.” “그 여자아이는 형편없어.” “마을에 어느 누구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 부끄럽지만 나도 같이 험담을 했었다. 나는 그런 나쁜여자아이들에 비해 내 자신을 우월하다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여자아이들이 겪었을 고난, 고통,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아기의 운명에 관해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 여자아이나 아기를 향한 어떤 연민이나 동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쁜 여자아이들이었고 그들은 비난받을 만 했다. 나는 우월함을 느꼈고 착한 여자아이였다.

50, 60년대 고등학교 생활에서 (적어도 나의 작은 마을에서는) 나쁜 여자아이들은 갈 데까지 간 것으로 인식되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착한 여자아이들은 들키지 않았다. 그 때는 콘돔을 제외한 피임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넘어온 것을 자랑했고 그들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가 더 많은 훈장를 얻을수록 더욱 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나쁜 평판을 받았다. 이중적인 기준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여자아이를 술에 취하게 하거나 그녀가 넘어오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감정 협박을 함으로써, 그들의 데이트 상대 혹은 여자친구에게 가차없이 섹스를 강요했던 남자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데이트 강간도 있었다. 데이트 강간은 정확히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흔한 것이었다. 그와 홀로 있었던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남자친구와 키스한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등등. 남자아이들은 비난 받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책임이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품위 있고 도덕적인 젊은 남자들을 옹호하자면, 여자아이가 임신을 했을 때 책임감을 느끼고 옳은일을 했던 몇몇 남자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그들은 그 여자아이와 결혼하였다. 이런 결혼을 샷 건(shot-gun, 속도위반)” 결혼이라고 불렀다. 몇몇의 남자아이들은 옳은 일을 하고 여자아이와 결혼하도록 그들의 부모나 여자아이의 부모에게 강요 받았다. 이것은 결혼의 좋은 기반은 아니었다.

, 사회는 남자아이들의 본능은 허락했지만 여자아이들은 결혼 할 때가지 처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저 섹스를 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심지어 섹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섹스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식에서 맹세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하루 밤 만에 성()의 요정으로 변신해야 했다. 따라서, 우리 중 몇몇은 감정 협박에 굴복했고, 몇몇은 강간으로 고통 받았고, 몇몇은 술에 취해 이용당했고, 그리고 몇몇은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사랑스러운 품을 저항할 수 없었다. 흔한 수단은 네가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했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은 사람은 우리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6살 때 임신을 하였다. 공포 중의 공포, 나는 그들중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알다시피, 매춘부, 부랑자, 창녀, 쉬운 여자가 된 것이다.

나는 수치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내 자신, 부모님에게 수치가 되었으며 평판 또한 떨어졌다. 또한 가문의 이름에 수치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이 나와 의절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복 동생이 있다는 생각에 신나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는 부정한 여자기 때문에 그 아이와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비서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11학년이었는데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고 그 곳에서 속기사와 접대원의 일을 얻었다. 나는 나이를 속였고 혼자 살았다. 일하고 돈을 모으면서 고향 사람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까봐 늘 두려웠고 너무 수치스러웠다.

 나는 캘거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한 충분한 돈을 모았고 사회 복지 센터에 연락을 하였다. 나는 숙식의 대가로 몇몇 가정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크레체 주(The Providence Creche)라는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가톨릭 시설에 배정되었다. 이곳에서 우리의 수치심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외출할 때마다 낄 결혼 반지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익명을 사용해야 했다. 나는 케이티 프루든(Kathy Pruden)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내 생각에는 프루든이라는 이름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이름이 나의 더러움을 없애고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줄 것처럼 말이다. 미혼모 시설의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도시 밖 출신이었고 아무로 서로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숨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을 숨기도록 지시 받았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슬픔과 혼란을 느꼈다. 우리는 수녀들에게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 아무도 우리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도 겪을 상실감, 슬픔,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진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었다.

나는 한밤중에 진통을 느꼈고 수녀 한 명을 깨워야 했다. 그녀는 홀리 크로스(Holy Cross)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고 나 혼자 두고 떠났다. 출산하는 동안 사무적이고 냉담한 직원들이 나를 돌보았고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빼앗아갔다. 내 곁에서 정신적인 지지나 친절을 보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간호사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아기를 데려다주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에게는 미소와 부드러운 속삭임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침대를 지날 때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내 아기를 볼 수 있냐고 질문했고 그들은 내가 딸을 포기했으니 아기를 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차갑게 대답하였다. (나는) 복도를 서성이며 내 딸을 알아볼 수 있을까 바라며 육아실을 훔쳐보았으나 눈에 띄자마자 쫓겨나곤 했다.

내가 병원을 떠나기 바로 전 아기를 볼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그들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15분동안만 허락 해주었다. 마침내 내 딸을 안아볼 수 있었고, 간호사가 갑자기 들어와 아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나는 내 딸의 작고 예쁜 얼굴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를 찾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입양으로 내 딸을 포기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변했으며 그 일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슬픔은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는 다양한 자해행동으로 나타났다.

수치심은 나의 자존감에 영향을 주었다. 수치심은 내가 모든 것을 부인하게 했으며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평판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내 가문의 이름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이 깊고 어두운 비밀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나는 상실감과 슬픔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비극적인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던 그 시대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시대와 사고방식이 변화해왔다. 사회는 더 인도적으로 변화했다. 미혼모들은 나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선택하기 힘들지라도 미혼모들에게 선택권이 있다. 여자들은 슬픔의 과정을 겪을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인정받고 허락되었다. 미혼모들은 제도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오늘날의 많은 어머니들이 몇몇의 우리가 겪었던 것을 겪지 않는 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그러나 이런 이슈에 대한 일반 대중들과 특히 입양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이 그것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견해에 따라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규율에 기초하여 그 시대의 사회 사고방식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우리는 규율을 어긴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치유를 위한 한 방법이다.

 

추신:

30년이 지나고 요청을 하자, 알버타 주정부 공공복지부의 어린이 복지 지부로부터 포기 신청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딸이 태어난 뒤 겨우 5일이 지난 후 병원을 떠나면서 신청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calgary-alberta-1960/

Christine’s Adoption Story – Newmarket, Ontario, 1982

1982, 14살 나는 임신을 했다. 엄마는 내 임신을 처음 눈치챘을 때, 우리가너무 늦기 전에 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의사와 진찰 예약을 잡았다.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한 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진찰을 받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진찰을 받게 되었고, 의사는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나의 임신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임신이었고 그것을해결하기에는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출산 전까지 시골에 계신 이모와 삼촌과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 일단 아기를 낳고 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나의 가족들의 계획은 그랬다.

이모가 아는 의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입양을 보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이를 키우고 싶은 내 열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기적이고, 미성숙하고, 애정이 없고, 잔인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조차도 아이에 불과했고, 나는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나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결정을 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고들 했다. 그 결정은 나의 엄마에게 달린 것이었다. 나는 약자였고, 엄마는 나의 보호자였기에, 엄마는 그 결정을 내릴 책임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엄마에게 그 결정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고 어리석은 실수가 나의 삶, 나의 미래를 망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납득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실은 엄마의 가족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들에게 불명예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할아버지와 나는 엄청나게 가까웠고, 모든 손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예쁨 받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내가 더 이상 손녀가 아니라고 했고, 나와 의절했다. 그 후 18년 동안 모든 가족 모임과 파티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무시했고, 투명인간 취급했다.

우리 엄마, 동생, 이모, 삼촌, 의사와 사회복지사들은 내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하며, 내가 줄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정을 찾아줘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나를 확신시켰고, 나도 스스로 확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로 그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15세가 되던 1982 10 6, 내 딸은 온타리오 뉴마켓의 요크 컨트리 병원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내가 내 아이를 만지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보는 것조차 금지했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를 보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나는 우리가 남은 삶을 함께 보내지 못할 것이라면, 적어도 함께할 수 있는 매 순간만큼은 가치 있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모는 내 편을 들어주었고 내게 아이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 후 4일 동안 나는 아이를 안고 흔들며 얼렀고, 뽀뽀하고 노래를 해주고 젖을 먹였다. 나는 아이에게 평생 동안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귀한 시간을 낭비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아이에게 꼭 붙어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왔지만, 손녀를 만나는 것은 거부했고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엄마가 실제로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마음을 바꿔서 우리 세 명이 함께 병원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딸 없이 병원을 떠나던 그날, 나는 죽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전의 나, 내가 믿어왔던 것, 내가 신뢰한 사람들은 그 즉시 없어져 버렸다. 내가 돌아갈 평범한 삶은 없었고, 나는 사라졌다.

나는 입양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 엄청난 감정적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내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해왔지만, 그들이 생모가 아닌 한 아무도 내가 경험한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입양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처이다. 선의에서 입양을 지지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딸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와 가족들은, 실제로는 딸들을 평생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게 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엄마의 삶에 영원히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 경험으로부터 평생 동안 결코 회복될 수 없다. 그녀는 깊고 가슴저린 공허함과 그녀의 삶에서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갈망과 함께 살아간다.

다른 아이를 가지는 것이 이 감정을 없애지는 못한다; 상처와 고통이 크게 자라도록 할 뿐이다. 그녀가 다른 아이와 함께 경험했던 각각의 중요한 순간들에는, 그녀가 잃어버린 아이와 함께하지 못한 모든 특별한 순간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슬픔이 따를 것이다. 엄마의 마음에는 그녀가 낳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각각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과 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지에 관계없이, 늘 빈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일부분은 항상 그녀의 아이와 떨어지는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그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아이를 안고 만지고 어르는 것을 그리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보낼 날은 그녀의 일평생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 그녀의 아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살펴달라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나는 밤 또한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십대의 임신을 장려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며,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가정과 사회가 십대 엄마들에게 '만약 그들이 아이를 걱정하고 사랑한다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옳은 일을 해야 하고,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하기보다는 '지지와 사랑, 그리고 보살핌'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사회는 십대 엄마들에게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정상가족, 번듯한 차와 명품들이 있는 큰 집임을 납득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십대 엄마들에게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감히 설득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실 아이들이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엄마와 아이 간의 유대는 끊어져서는 안 된다.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학대이자 고문이며, 둘 모두 이로 인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텅 빈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고, 행복한 결말은 있을 수 없다.

엄마와 아이의 재회가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쌓기 위해 많은 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또한 가족들에게 아이를 소개할 때, 편안하고 알맞은 역할을 찾으려 노력하면서 가족 모두 애써야 할 것이다.

내 딸 없이 퇴원하던 날은 내 죽음의 날이었다. 나는 결코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지 못했고, 그 후 21년 동안은 나는 유령처럼 살았다.

만약 당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딸에게 등돌리지 말라고 모든 부모에게 강력히 충고한다. 딸과 당신의 손주를 위해 그 자리에 있어주어라. 그들이함께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15살 소녀에게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이를 키우게 하는 것보다 더 그녀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ontario-1982/

 

시다의 입양 이야기 브리티시컬럼비아 빅토리아, 1980

 

사람들이 우리의 “(아이를) 포기하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1980, 첫째 아이를 낳았을 당시에 나는 17살이었다. 나는 미혼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내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친척들이 알지 못하도록 부모님은 나를 웨이지홈(wage-home)’으로 보냈다. 내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를 빼앗아갈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다.

 

오전 1시에 진통이 시작됐다. 부모님이 나를 페어필드 로드에 있는 빅토리아 종합병원에 데리고 가서 입원 신청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처럼 일반적인 진통과 출산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미혼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원한 다음 나는 이동식 침대에 눕혀져서 작은 창고로 보내졌다. 간호사는 나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진통이 있던 그날 밤의 첫 6시간 동안 그냥 자도록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진통이 심해서 잘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밤중에 딱 한 번 내 상태를 확인하러 왔고,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수면제를 더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나는 24시간 동안 깨어있었다. 여전히 진통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거나 마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레지던트가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데메롤(Demerol-진통제)을 줬지만, 오히려 구역질이 나고 정신이 멍했다.

 

오후 5시쯤 자궁이 완전히 넓어졌을 때, 나는 지난 18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한 채로 30시간 동안 깨어 있는 상태였다.

 

차가운 하얀 빛이 비치는 분만실로 이동되어 분만대에 줄로 묶인 채 눕혀졌다. 발 고정대에 발을 올린 채, 팔은 가죽줄로 탁자에 묶여있었다. 그 때는 이러한 조치가 내가 분만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내 아이를 세균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내 아이는 탯줄을 자르기 무섭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정말 잠깐도 볼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법적으로 여전히 내 아이였지만, 내 허락도 없이 아이를 빼앗아갔다. 입양시스템은 이렇게 내가 아이와의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게 해서 아이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나는 외음 봉합술을 받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외음 절개술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취는 이뤄지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힘이 없어서 걸을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아이를 봐도 되냐고 물어봐도 거절당할까 봐 묻지 못했다. 나 역시 아이를 볼 권리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간호사들은 자라고 말하며 독한 진정제를 투여했다.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 발을 끌며 조금은 걸을 수 있었고, 마침내 간호사에게 내 아들을 봐도 되냐고 물어봤다. 놀랍게도 그 간호사는 괜찮다고 말했다. 내 아이는 내 병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기방에 있었다. 의사가 나를 산부인과 병동이 아닌 부인과 병동에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고, 온몸의 멍과 10cm의 외음봉합 상처로 인해 아팠지만, 내 아이를 보기 위해 병동의 다른 한 쪽 끝까지 혼자 느리게 걸어갔다.

 

내 아이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본 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내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모성애였다. 모든 피, 육체와 정신에서 비롯되는 사랑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 아이가 태어날 때, 역시 엄마로써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본능, 두 몸에 한 영혼이 있는 유대감, 엄마와 아이가 공유하는 욕구, 내 아이와 함께 지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이 출산의 현실이며, 모든 여성이 겪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직접 알게된 사실이다.

 

나는 내 생명보다도 내 아이를 사랑했다. 내 마음 전부와 내 몸의 모든 세포로 아이를 사랑했고, 안아주고 꼭 껴안고 데리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기방에 있을 때, 간호사들은 내가 아이를 안지 못하도록 계속 지켜봤다. 나는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단 침입한 느낌이 들었고,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내 아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아이를 스스로 키우고 싶었지만 사회복지사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회복지사는 내가 입양서류와 출생신고서에 서명하도록 내 병실에 왔다.  내가 입양이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더니 사회복지사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입양하라고 압력을 줬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마음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하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세 달 전에 자기 아들을 입양시킨 경험이 있는 다른  고객한 명을 보냈다. 그 사람은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에 대해 극찬 했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어머니가 되기에 너무 어리고 내 아들은 정상적인 부모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출산으로 인한 호르몬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표했다. 내 부모님도 내 아이를 절대 집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나는 이미 부모님에게 가족의 수치였기 때문이다.

 

내가 울면서 아이가 태어난 지 며칠 후 서류에 서명했고, 주변의 모든 어른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내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고 (내 부모님의 눈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사회복지사 사무실에서 어떤 서류에 서명을 했던 그 사본을 받지 못했다.  그 곳에는 내 권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변호사가 없었다.  19세 미만의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사회 복지 혜택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복지사에게 내 아들이 (내가 그를 법적으로 찾아도 될 수 있는) 19세가 될 때 내가 찾으리라는 것을 입양한 부부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것뿐 이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에게 그 부부가 내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사회복지사는 내 부탁을 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편지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입양 후 여파의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당시 사회복지계가 비탄과 고통, 상실감 등 입양의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당시 아무도 나에게 그 결과들에 대해서 경고하지 않았다.  한 사회복지사가 내 소중한 아이 미샤엘(Michael, 별명은 미샤’)을 양부모가 병원에서 데리고 나갔다는 마지막 전화를 했을 때 나의 일부는 죽었다.

 

 (24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그 때의 눈물을 흘리고 그 순간들을 감정적으로 다시 느낀다. 내 아들과의 상봉은 억제된 기억과 감정을 드러나게 했다. 회상들은 참혹하고 나를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 고통과 기억들이 내가 아직도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느껴진다. 게다가 나는 내 소장이 죄어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신체적 영향 때문에 네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을 잃은 충격에 빠진 상태로 고등학교 3학년을 4개월만에 끝냈지만 약 8개월 후, 충격이 사라지자 내 아들을 잃은 것으로 인한 심한 고통에 대처하려2년 동안 노력했고 대학을 중퇴했다.

 

소울메이트였던 내 남자친구와 나에게 생긴 일로 인한 고통이 우리의 헤어짐의 원인이 됐다. 근친과 사별하는 것보다 100배 더 심한(내 아버지나 형제의 죽음과 같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고통과 상실감에 대해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다. 내 애인은 고통을 줄이려고 마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경우에는 몇 년 동안 아무렇게나 살고 나서 다행히 고통을 감추게 됐지만 내 아들과 상봉했을 때 그 고통이 다시 떠오를 줄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들을 법적으로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남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내 아들이 9살이나 10살 때쯤 되었을 때는 사립 탐정도 고용해 봤지만 아들을 찾지 못 했다.  그 동안 내 가슴에 있는 블랙홀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세 명 더 낳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어떤 아이도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알게 됐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것은 내 이야기다.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친 적이 없다.  그리워하기를 그만둔 적도 없다.  아들을 키우는 방법을 찾지 못한 내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지금 내 아들이 나에 대해 느낄 분노보다 더 심하다. 나는 결국 사회복지사들의 고객들을 위한 아기를 낳기 위해 조종, 이용당한18살의 어머니였다. 미성년자가 어른들에게 강요당해 성관계를 하는 것은 성적인 착취라고 한다. 그들이 이득을 얻기 위해서 미성년자의 생식력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생식적 착취(reproductive exploitation)!

 

젊은 여성들이 친부모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자기 아이를 위해서 입양이 제일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글들을 읽을 때, 그들에게 입양 과정을 거치면서 겪을 일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매일 그리고 매번 느끼는 이 고통을 내 원수에게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친어머니들이 자기를 포기하기로 한 선택에 대한 말을 할 때 내가 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은 없었다는 것이다.

 

상봉에 대해 덧붙이자면, 내 아들이 19세가 됐을 때 내 혼외 출산 죄에 대한 처벌이 끝나, 드디어 난 내 아들을 법적으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내 아들의 인생에서 나의 접근 금지가 끝났고 그를 찾았다. 그리고 내 아들의 눈을 봤을 때 우리 둘의 영혼은 서로를 알아봤고 나는 오래 전, 입양으로 인해 잃었던 내 아이를 알아봤다. 내 안에 있었던 장벽들이 무너지고 20년 동안 숨어 있었던 비탄이 다시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울기 시작했다. 건장하고 키가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내 아들은 내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나를 안아줬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은 우리 가족, 그가 파파로 부르는 친아버지와 상봉했다. 태어났을 때 내가 준 이름을 다시 사용하고 있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우리 둘이 법적으로 가족이 될 수 있게 미래에 내가 그를 입양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 아들이 나를 안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내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더 치유된다.

 

입양 관행은 일단 아기 엄마를 무너뜨려야만 아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다이앤 웰패이르 (Dian Wellfare), 오리진스사 (Origins, Inc.) 창립자는 말했다.

 

이는 2001 10 16일 내 아들과 상봉한 다음, 아들의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메일에서 잘 알 수 있다. “램지[Ramsay, 양부모가 내 아들에게 준 이름]는 어머니 한 명과 아버지 한 명이 있다램지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고 어떤 방식으로도 그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했다.

 

입양은 원해지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원해지지 않은 어머니들에 대한 문제다.

 

 원치않는 아이들을 버리고, 그들에게 영원히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무관심한 친어머니의 그림들을 만든 곳은 바로 아동복지기관이다. 아동복지기관은 이런 어머니들이 거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반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을 편리하게 한다. 사회정책개발자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은 친부모가족의 중요성을 쉽게 묵살하지 않기 때문에, 아동복지기관은 아이를 포기한 부모들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부모들과 다르게 묘사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입양을 보낸 친어머니는 다르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친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만큼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면 입양의 장점은 입양의 비극에 눌릴 것이기 때문이다. 입양부모들이 친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들의 죄책감은 어느 정도 줄어드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차지할 권리가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회도,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의 극심한 고통을 직시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 마가레트 맥도널드 로렌스 (Margaret McDonald Lawrence), 미국 입양 회의 첫 전국 대회에 한 연설, 워싱턴 D.C., 1979 5 4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victoria-bc-1980/


리사의 입양 이야기: 오타와, 온타리오, 1990

 

 

 

나는 1990년에 딸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했다.

 

 

 

내가 임신했을 때, 사람들은 내게 계속적으로 강요하고, 거짓말하고, 조종하고, 스토킹하고, 괴롭히고, 큰 소리로 소리치곤 했으며, 나의 권리 (혹은 나의 딸의 권리)를 대변할 변호사도 없이 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나는 문서를 읽는 것도,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문서의 내용을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는 현재 내 서명이 위조됐는지 확인하는 중이지만, 이미 피해를 입었다.  나는 그 문서들의 어떤 사본도 받지 못했다. (18년이 지나 문서에 쓰여 있는 신원 미확인 정보를 받았을 때, 나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회파괴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사회복지사는 내 아름다운 딸에게친어머니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만족했다고 말했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고 비탄에 빠져 있었을 뿐, 만족했던 적은 없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내장 수축, 해결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의 지옥 속에 살았던 것도 만족으로 간주되는가?

 

 

 

나는 그때 16살이었고, (입양 서비스를 제공하던) 아기 중개인들이 내 서명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나를 엄마와 떨어뜨려놓았다. 그렇다. 나는 극도의 협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그들의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 딸을 스스로 키우고 싶다고 거듭 말했고 분명히 알려줬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내 딸을 데리고 있으려는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내가 그리 이기적이었는가?! 내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집에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내 딸을 계속 키울 수 있게 해줬을 금융 정보는 고의적으로 제공되지 않았다. 아이의 아빠 역시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사회복지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조산 시설로 보낸다고 협박했다. 내가 혼외 정사 죄를 범했기 때문에 조산 감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역겹다. 요즘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입양이 허용되지 않는가?  아이는 반드시 부부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로 갔나? 위선자들.

 

그들은 내가 딸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했다. 또한 내 딸에게너의 친어머니는 본인보다 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네가 길러지길 원했다고 말했다. 나보다 내 딸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 어느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바로 내 딸의 어머니다. 그 사회복지사는 내가 딸과 다시 만날 가능성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는 내 딸의 존재를 잊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아이는 내 아이니까!

 

 

 

 

 

 그들은 내가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내 아이는 무한정 가정위탁보호서비스 하에 놓여있게 되며, 만약 내가 가정위탁보호서비스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내가 서명을 하든 하지 않든 그들은 내 아이를 빼앗아갈 것이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내 딸을 스스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내 딸의 입양으로 벌 수 있었던 돈을 원한 것이다. (우리 학교에는 나 이외에도 임신한 여자가 두 명 더 있었다. 사회파괴자들에게 왜 다른 엄마들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지 물어봤더니, 그들은얘야, 너는 백인이잖니라고 말했다.) 내 딸을 잃은 후, 다른 두 명의 엄마들은 사회적 지원을 받아서 행복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은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들의 아이들은 고통 받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과 비탄 속에서 평생을 살고, 매일 피를 흘리는 듯 느끼면서 하루 하루를 견디려고 노력해오던 중에, 나는 내 딸이 속아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딸에게 진실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딸을 입양한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를 당하고 있다.) 내 딸이 상처를 입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를 정말 사랑하고 보고 싶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렇다. 사회복지사들은 나에게 꺼지라고, 닥치라고도 했다. 임신했던 기억 자체를 잊으라고 했다. 그들 중 몇 명은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동의하도록 강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임신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서, 왜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느냐고 했다. 뱃속에 있는 내 딸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내가 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들은 그런 말을 싫어했다. 내가 아이를 낳는 것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나? 내 모성이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나?

 

 

 우리는 입양을 이렇게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괴, 납치, 그리고 끔찍한 것. 입양은 거짓말을 만들기 위해서 어머니들을 망쳐버린다.

 

 

 

 

 

 

 

1963, 카렌 (Karen Lynn) 어머니가 그녀를 온타리오 클락슨(Clarkson, Ontario) 미혼모 시설로 보냈을 , 카렌은 19살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성을 사용하는 대신 카렌A라고 불렸으며, 입양에 동의해야만 시설에 머무를 있었다.

일년 , 빅토리아(Victoria) 있는 병원에서 당시 스무 살이었던 샤론 피더슨(Sharon Pedersen) 출산 마취되어 침대에 묶여졌고, 이후 창문을 통해 신생아실의 자신이 낳지 않은 명의 아기를 았던 것이 전부였다고 말한다.

 

그녀가 입양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려 소리를 지르고 가구를 던지자, 사회복지사들은 손에 강제로 펜을 쥐게 했고 경찰을 부른다고 협박했다. 결국 그녀는 지역 아동지원단체의 입양동의서에 서명했다.

 

캐나다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밝혀지면서, 이때까지 캐나다의 입양 관행에 대한 연방 정부의 조사를 요청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난 ,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와 다시 만날 있었지만, 그들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졌던 강제적 입양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든 미혼모가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되거나 강제적으로 입양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에 드러난 미혼모들의 사례가 전부인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루어진 입양에 관한 최근 호주정부의 조사에 제출된 증언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지난 호주 상원 위원회는 정부가아이를 강제적으로 빼앗긴 많은 부모들에게 사과를 하도록 촉구했다.

 

분야 관련 전담 변호사에 의하면, 캐나다에선 조사에 대한 단순한 요구를 넘어 퀘벡(Quebec) 비롯한 서부지역 ()정부를 납치, 사기와 강압으로 고소하는 집단소송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대변인인 부르스 그레거슨(Bruce Gregersen) 이야기는 슬프고 힘든 분명하며, 우리는 이제야 이야기들을 듣기 시작했다 말했다. 연합 교회가 다른 단체와 함께 운영한 위니펙(Winnipeg) 있던여성을 위한 교회 ’(Winnipeg’s Church Home for Girls)에서는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고자 한다면 형사 입건될 있다고 통보받았다. 그레거슨은이것이 우리가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라고 덧붙였다.

 

<내셔널 포스트(National Post)> 일곱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그녀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것이 처음이었으며, 미혼모가 아이를 입양시키도록 했던 단순한 사회적인 압박 이상의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십대의 미혼모였던 밸러리 앤드루즈(Valerie Andrews)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모유 수유를 멈추는 약을 먹었다고 했다. 한나 앤더슨(Hanne Andersen) 역시 십대의 미혼모로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려고 했지만, 이미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 병원 기록에는입양을 위한 아기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말했다. 온타리오 서드베리(Sudbury) 사회복지사들은 에스더 타디프(Esther Tardif)에게 그녀가 공공부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사랑한다면 입양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에서 인터뷰한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강압이 체계적이었다고 말했다. 교회가 운영하는 조산시설에서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서는 입양이 필수 조건이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헤어짐의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야만 했다. 사회복지사들은 공공부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미혼모들이 아이를 위태롭게 있기 때문에 기소될 있다고 말했다. 의료진들 역시 미혼모들을걸레라고 부르며 진통제를 주지 않았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십대들을 침대에 묶고 천으로 그들의 시야를 가려 출산과정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입양 관행 하의 어머니들에 대한 나쁜 대우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캐나다의 생모 협회(Canadian Council of Natural Mothers) 회장인 (Lynn)캐나다의 기득권층에게 이번 이슈는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상너는 아기를 포기했어라는 말을 들어왔고, 때마다 내가 말한 것은 기껏해야 그것이 비극적인 선택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앤드루즈는 캐나다 통계청의 1945년부터 1973년까지의 사생아에 대한 정보와 당시 대략적인 미혼모들의 입양 선택 비율을 연구했고, 결과 천문학적인 추정치를 내놓았다. 무려 35 명의 캐나다 미혼모들이 입양을 선택하도록 설득이나 강요, 강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리 체임버스(Lori Chambers) 어떤 미혼 여성들이 아이가 안정한 가정에서 자라고 사생아의 오명을 피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69년까지 온타리오의 미혼모들에 대한 <오해(Misconceptions)>라는 책을 쓰기 위해, 보관되어있던 수천 가지 아동지원사례를 조사한 있다. 배척 당한 여성들 모두가 조산시설에서 고통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는 제공받을 없는 주거지와 음식, 우정에 감사하는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체임버스는 “‘미혼 여성들이 아이들을 포기했는가 아니라, ‘어떻게 어떤 여성들은 포기하지 않을 힘을 가졌나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대부분의 미혼모는 아이를 포기하고 아이를 입양을 보낸다 말했다.

 

앤드루즈는 낙태가 불법이고 피임이 쉽지 않았으며 미혼모를 문란하고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지능이 너무 낮다고 보았던 시기에, 교회가 운영한 조산시설과 병원, 아동지원단체들에서 십대 미혼모들이 받은 대우를 지난 4 동안 기록해왔다.

 

1960년대에 토론토(Toronto)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미혼모 문제를 다루던 사회복지사 조이스 마셀링크(Joyce Masselink) 앤드루즈의 추정치가현실적이지 않은 같다, 그녀가 자주 방문하던 밴쿠버(Vancouver) 교회가 운영하던 조산시설에 있던 소녀들은아주 좋은 대우를 받았다 말했다.

 

온타리오 하원 의원 마릴린 철리(Marilyn Churley) 1968 임신했을 당시 도와줄 사람이 없을 , 온타리오의 사회 복지사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는 입양 이외의 대안에 대해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았고, 철리는 진통제 없이끔찍한” 24시간의 진통을 참아야만 했다.

 

마셀링크는내가 알고 있는 사회복지사 입양을 강요한 사람은 없었고 나도 절대 그러지 않았다 했지만 몇몇은 당시의 사회적 가치관을 철저하게 따르도록 유도했다고 덧붙였다. “그런 관행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말했다.

 

1961425일자 신문의 인생 상담란에 랜더스(Ann Landers) 칼럼은 당대의 미혼모에 대한 시선을 가장 보여준다. 미혼모의 자식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녀는그런사랑 의심스럽다. 그것은 병적이고 뒤바뀐 사랑이며, 자기 연민과 자멸, 순교의 불건전한 조합이다라고 썼다.

 

앤드루즈는 인터뷰를 대부분의 어머니들이수치심을 느낄까봐그들의 비밀을 수십 동안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난 호주의 보도자료가 나온 이후로, 캐나다인 어머니들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원치 않았던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릴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앤드루즈는 토론토에서 이번 가을에 캐나다의 입양 역사를 밝힐 이틀 간의 회의를 준비했고 수백 명의 어머니들과 입양된 사람들이 참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주 위원회는 정부가 그때의 사회적 가치관을 언급하지 않고, 어머니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하도록 요구했다. 보도에 따르면 어떤 어머니들은체계적인 무력화로 임신 기간 동안 피해를 받았다 말했다.

 

온타리오에 사는 케이티(Katie) 자신의 딸이 자신이 강간으로 임신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성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나는 아직도 수치심을 느낀다. 병원 기록을 통해 사람들이 나한테 짓을 후에야 끔찍한 부담에서 벗어나 편히 숨을 있었다 말했다.

 

케이티는 그녀가 살던 연합 교회 시설에서 멀지 않은 위니펙 병원에서 분만유도약을 받았고, 자신의 아이를 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발의 17 소녀는화학적 구속복(like a chemical straight-jacket-정신 이상자와 같이 폭력적인 사람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해 입히는 )" 인해 정신을 잃었고, 나중에 깨어났을 갓난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검은 머리의 아이를 보았다고 했다.

 

케이티는 입양동의서에 절대로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가 법정에서 끄덕인 것이 딸을 국가의 보호를 받는 피보호자로 만든 같다고 기억한다.

 

체임버스는 온타리오의 아동지원단체들이1965 정부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기 이전에는 대부분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었고, 아이를 입양한 부모로부터도 빈번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단체들은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이 있었고, 가끔은 아이의 친아버지와도 거래를 했다. 거래 조건은 그가 입양에 동의하고 단체에 소액을 지불하면, 단체가 비용이 많이 드는 법적 양육비 분쟁에서 여자를 변호하지 않는 것이었다.

 

입양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지원하는 오리진스 캐나다(Origins Canada) 대표인 앤드루즈는 캐나다 연방 정부가 호주의 선례를 따르고 자국에서의 조사에 착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녀는 100명의 어머니와 입양된 사람들이 기관에서 실시하는 추후의 조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리진스 캐나다에 등록했지만 법무부 장관인 니콜슨(Rob Nicolson) 측에서 앤드루즈에게 이것은 주가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고 말했다. 장관의 대변인은 그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앤드루즈에 따르면 2011 7월에 그녀의 온타리오 주의회의원인 레자 모리디(Reza Moridi) 아동청소년 복지부 장관에게 편지에는 아직까지 답장이 없다.

 

앤더슨은아무도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호주 여성들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앤더슨은 태어났을 불법적으로 헤어진사람들을 위한 변호 그룹인 어머니와 아이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other and Child) 현재 이끌고 있다.

 

앤더슨은 수요가 높은 건강한 백인 아기를 낳은 어머니들이타겟이 것에 대한 캐나다기마경찰(RCMP) 범죄 조사를 촉발시키기 위해서 이번 달에 경찰에 신고서를 접수할 계획이다. 1982 15살의 나이로 임신한 앤더슨은 자기 아이를 안아 보는 것이 번밖에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앞으로 주나 개월 안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정부를 상대로 제기할 집단소송에서 대표 원고의 역할을 것이다.

 

앤더슨은 자신이 실제로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입양에 동의했다는 것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출산 직후 발은 아직 고정대에 있었고 아기를 없도록 몸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그들이 아이를 담요에 쌌다나는그만하세요! 우리 아기를 데리고 어디 가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다가 결국에당장 아기를 데리고 와요!’ 라고 소리쳐야 했다 말한다.

 

집단소송 진술서의 초안은 이번 집단소송이 “BFA(Baby for Adoption – 입양을 위한 아기) 의정서 인해 영향을 받은 여성들을 포함할 것이고 부모로써 아이를 키울 기회 박탈 동의가 없는 의학적 치료, 정신적 고통에 대한 일반·특별손해를 다룰 것이라고 명시한다.

 

앤더슨의 유명한 변호사인 토니 머챈트(Tony Merchant)아이가 혼외로 태어났을 경우,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지낼 없다는 정책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했다.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있는 머챈트의 법률 사무소는 2006년에 인디언들을 위한 기숙 학교와 관련한 집단 소송에서 20$(캐나다 달러) 합의를 이끌어낸 있다.

 

호주에서 조사자들은 BFA정책이 당시 만연했던완전한 단절 이론 적용한 것이라고 들었다. , 출산 친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당시의 최선책이었다는 것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아동가족발달부는 대변인을 통해 “1960-70년대에 여성들이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한 정부의 공동 정책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머챈트는 정부가 교회 운영 단체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번 집단소송을 통해 단체들의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정부에 지우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세군(Salvation Army) 대변인 머레이(John Murray), 앤더슨은 조산시설에서 굶고 폭언을 들었으며, 어떤 공조제도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메이우드(Maywood) 같이 정부 재정 지원을 받은 조산시설들이 도움이 필요한 십대 임산부들을 제때에 도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40-50 전에 단체들이 그들의 시설을 어떻게 운영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할 없다고립적인 상황들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그러나 분명히 역사적으로 지역 주민들은 구세군을 환영하고 소중하게 여겼다고 생각한다 덧붙였다.

 

 

 

린이 머물렀던 조산시설을 소유한 캐나다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대변인은지금은 40 전에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했다. 캐나다천주교중앙협의회(Canadian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상황에 대해서 논평하는 것은 특정한 교구의 몫이라고 했다. 캐나다의학협회(Canadian Medical Association) 캐나다소아과협회(Canadian Pediatric Society) 대답하지 않았다. 온타리오 어린이구원단체 협회가 인터뷰 요청을 토론토 어린이구원단체에게 넘겼지만, 단체 역시도 개별적인 인터뷰 요청에 답을 하지 않았다.

 

 

한편 그레거슨은 이제 연합교회가 조산시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록된 자료를 살펴보겠지만 연구자들이 그들의 노력의 초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있도록 어머니들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피더슨은 문제에 대해서 캐나다는 너무 뒤쳐져있다면서호주의 보도가 나왔을 때부터 나는 기대감에 가득 있었다. 이제는 입양들이 강제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됐다 했다.

 

 

 

Kathryn Blaze Carlson | 12/03/09 National Post

 

 

 

If you have further information for the reporter on this story, please email kcarlson@nationalpost.com.

 

 

원문 : http://news.nationalpost.com/2012/03/09/curtain-lifts-on-decades-of-forced-adoptions-for-unwed-mothers-in-canada/

 

 


결혼제도 밖에서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축복은 커녕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미혼여성들도 아이를 낳아서 키울 권리가 있으며 이것을 사회적인 낙인과 부족한 지원으로 인해서 잃게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 위기에서 축복이 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알려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 글을 준비했습니다.^^


임신했구나! 축하해! 

어쩌면 당신에게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당신은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 때문에 축하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신을 계획하지 않고 한답니다. 계획하지 못한 임신을 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자, 그럼 이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죠. 그리고 당신을 위해 당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들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예측 못한 임신을 했다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 인생의 어떤 새로운 시작이죠. 계획 못한 임신이 창피하거나 끔찍한 일은 아니에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당신은 비록 임신을 계획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종류의 난감한 일들은 살면서 해결해왔으며 이 또한 해결해야 할 일이죠.


자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봐요…… 당신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요. 단지 피임하지 않고 관계를 가졌고 그 결과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한 거죠. 이런 일은 매일 모든 경우에 가임 여성에게서 결혼을 했건 하지 않았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당신은 단지 그 사람들 중에 한 명이죠. 이제 진정하세요.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나를 따라 해보세요. "임신으로 내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임신은 내가 풀어야 할 문제이고 나에게는 그렇게 할 능력이 있다. 난 임신을 했고, 나 이전에 수십억 명의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예측 못한 임신을 해결할 수 있다" 고 말이에요.


당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당장 신경 써야 할 일은 건강한 임신과 출산이고 그리고 아기를 위해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 오리진스는 원가족 보존을 지지하며 학대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증명된 바 없는 입양가족에게 아기를 보냄으로써 엄마와 아기가 헤어지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포기한 입양 보내진 아이가 어떤 입양후유증을 겪게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출산할 계획이라면 아이를 기르는 것 역시 계획하길 바랍니다. 



이미 입양이 진행 중 이세요?

이미 당신이 입양기관 또는 개인입양을 통해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으나 아직 입양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입양기관과 장래의 양부모 또는 입양과 관련된 어떤 사람과의 계약도 끝낼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마음이 바뀌었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세요. 당신이 입양을 안 하겠다고 말한 뒤에도 입양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연락한다면 당신은 경찰서에 가서 그들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달라고 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들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 오리진스는 당신이 우리에게 연락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접근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도와주길 원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권리를 옹호할 것입니다. 

입양절차를 밟는 중 언제라도 당신은 입양기관 또는 입양을 하고자 하는 사람과 관계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잘못된 걸 뻔히 아는 결혼식,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돈을 써버려 취소하기에는 두려운 그런 결혼식 날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취소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권리이고 그 사람들에게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단지 전화번호와 메일주소를 바꾸고 어떤 변호사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도 겁먹지 마세요. 당신은 언제든지 입양을 철회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이고 양부모는 당신이 입양 동의서에 사인하기 전까지 그리고 입양철회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입양기관은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당신에게 "부모 될 사람을 선택해라", "구두로 먼저 동의를 하자", "위탁 축하파티를 하자" 등등의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합법적인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마케팅 용어로는 이것을 “트라이얼 클로즈 trial close”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판매를 확실히 한다는 뜻입니다. 입양의 경우는 당신이 아이를 포기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엄마로서 당신의 권리를 확실히 주장하고 입양기관에 당신이 아이를 키울 것이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세요. 그들의 압박에 굴복하지 마세요. 그들은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들과 모든 연락을 끊으세요.

note: 만약 당신이 아동구호협회(Children’s Aid Society)와 입양을 진행 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들은 아이를 계속 빼앗아 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한번 그들의 시야에 포착이 되면 그들을 떼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혹시 당신을 지지하는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리진스도 역시 도울 수 있습니다. 혹시 아동구호협회 (Children’s Aid Society)를 상대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전화하세요. 우리는 이 분야에 경험이 있고 당신의 권리를 알고 있으니까요. 



 >> 당신이 명심해야 할 것

  1. 의사를 찾아가 정기적인 산전관리를 받으세요. 그래야 그것에 관한 기록이 병원에 남을 것이고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당신이 아이를 양육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즉 당신이 그런 의지가 있다는 것은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올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원에서 집으로 올 아이를 위해 아기 옷, 기저귀, 침대 그리고 모든 아기 용품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육아교실에 참여하고 그 기록을 꼭 보관하세요- 매우 중요합니다! 
  4. 쾌락을 위한 약이나 술을 하지 말고 ‘파티’도 멀리 하세요. 당신은 이제 곧 엄마가 될 것입니다.
  5. 오리진스에 연락하세요.


당신은 아이를 양육하기로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옳다고 느낄 것입니다. 당신의 아이를 꼭 안고 아이에게 절대로 낯선 사람에게 보내지 않을 거라고 말하세요. 당신은 부자가 아닐 수도 있고 교육을 잘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최선을 다할 것이고, 당신의 아이를 낳은 엄마이며,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노력하여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부모가 되세요. 당신의 아이는 온 생애를 통해 당신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엄마입니다. 아이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느끼고, 당신이 어떻게 숨을 쉬는지 그리고 당신의 심장박동과 목소리, 웃음,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모든 면에서 당신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과 이미 하나입니다. 당신은 당신 아이의 엄마이고 만약 당신의 아이가 선택권이 있다면 아이도 당신 말고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출산 후 아이와 헤어지게 되면 당신과 아이 둘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는 트라우마로 인해 남은 인생을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태어나자 마자 엄마에게서 떨어진 어린 사자 한 마리를 상상해 보세요. 이 아기 동물은 엄마를 잃어버려 울부짖을 것이며. 엄마 냄새가 나는 곳,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곳, 엄마 젖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맬 거예요. 당신이 이 모습을 본다면, 그 아기 사자가 엄마를 찾아 헤맬 때는 안타까워할 것이며 엄마를 찾게 되면 비로서 안심하겠지요. 당신의 아기도 그럴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요. 그러니 그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딴소리 못 하게 하세요. 

 

당신은 자연의 법칙에 의한 아이의 엄마이며 아무도 이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 내용출처 - http://www.exiledmothers.com/index.html

※ 이미지출처 - art.com,bikestylespokane.com, medicalpracticetrends.com, http://www.presentermedia.com/index.php?target=closeup&maincat=clipart&id=5514, news.ecbonline.com, http://www.iappfind.com/app/366231159, emfsafetynetwork.org, http://www.macbioblog.com



지난 번에는 미국의 공격적인 입양시장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이 추세는 미국만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과 이웃나라인 캐나다에서도 미국을 본 보기로 한 입양이 산업화 되어 간다는 우려와 경고가 담긴 글이 있어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캐나다에서는 일반적으로 입양을 산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캐나다인 대부분은 입양산업이라는 생각을 불편하게 느낄 것이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캐나다에서 입양은 산업이고 그리고 그 산업은 두 자리 숫자로 성장하고 있다. 입양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산업이다. 왜냐하면 어린 싱글맘을 지원하는 것과 아이들을 기르도록 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론적으로 이유인 것이다.  


캐나다에서 벌어지는 입양은 지난 몇 십 년간 점차적으로 미국의 형태를 닮아가고 있다. 


미라 루벤(Mirah Ruben)이 쓴 황새 시장(The Stork Market)[각주:1] : 수십 조 달러 규모의 통제되지 않는 미국 입양산업(The Stork Market: America’s Multi Billion Dollar Unregulated Adoption Industry)」 에서는 미국의 입양산업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이웃 미국은 입양 산업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돈을 벌 기회가 있는 곳에 사업은 성장하기 마련이고 점차 미국의 입양산업과 닮아가고 있는 캐나다에서의 입양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캐나다에 입양 산업이 없다고 추정하는 것은 적어도 순진한 일이다. 사실을 파헤쳐보자……


현재 캐나다 입양 기관의 웹사이트는 미국의 입양기관을 모델로 하고 있다. 부드러운 색과 귀여운 아기들 그리고 선물로 아기를 주는 행복한 "생모" 의 임신한 배의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또 다른 은밀한 마케팅 방법들 모두 전반적으로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것들이다. 캐나다의 입양 웹사이트에서는 그들의 마케팅에 "출산모(Birthmother)" 에서처럼 미국에서 만들어낸 "출산(birth)" 이란 용어를 마케팅을 위해 사용하고 "출산모들에게 편지" 의 작성을 돕고, 입양을 하고자 하는 캐나다 사람들이 스스로 "출산모" 를 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력사항을 웹사이트에 올려 놓는다. 그 때부터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은 임신한 여성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 출산모" 라고 부른다. 

입양희망자들은 영원한 가족이 필요한 연장아나 장애아들 보다는 "신생아" 를 찾기 위해 이러한 서비스를 더욱 이용하게 된다. 

주정부들은 입양기관들을 느슨하게 감독하는데, 단지 일 년에 한 번 정도 기관들이 이러저러한 규정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할 뿐이다. 그것도 거의 재정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런 입양산업에는 어리고 상처받기 쉬운 임신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견제와 균형은 없다. 

사실 캐나다의 입양법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차 퇴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출산 후 24시간 안에 입양동의를 할 수 있다" 고 짧은 입양숙려기간을 "생모" 들에게 긍정적으로 홍보되고 있다. 캐나다에서 입양 숙려기간은 마니바토주(Manitoba)는 48시간 서스캐처원주(Saskatchewan)는 72시간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주들은 7일에서 10일이다.

최근에 뉴 브런즈윅(New Brunswick) 법이 바뀌어 출산 후 보장된 입양숙려기간을 미국처럼 단축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법은 분명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숙려기간을 늘여서 엄마와 아기가 불필요하게 헤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출산 후 산모가 회복할 시간과 자신의 아이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영국의 엄마들은 출산 후 6주안에는 입양에 동의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출산 전후로 하여 입양동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더 많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는 엄마일수록 입양동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출산 후 빨리 입양동의를 하도록 허락하면 입양시장에 더 많은 아이들이 나올 것이고, 엄마가 아기를 다시 되찾고자 하는 것은 입양기관의 재정적 손실이 된다. 

돈이 거래되는 변호사 및 입양기관의 서비스와 입양관련 산업과 기타 서비스들은 캐나다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업의 한 분야이다. 

캐나다에서 입양비용은 다양하다. 입양이 주정부와 아동보호지원센터를 통해 이뤄진다면 아주 적은 비용이 들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국내입양이라면 비용은 매우 편차가 심한데 $10,000-20,000까지 들 수도 있다. 


 캐나다의 누군가는 이 돈을 받는다. (Someone in Canada receives this money.) 

어느 나라에서든지 해외입양은 최대 십만불까지 든다.

모든 입양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한가지 필수사항은 가정조사이다. 입양희망자가 캐나다 어디에 살든 가정조사는 받아야 한다. 이것은 가족을 조사하는 것으로 승인을 받은 입양기관 관계자 통상 사회복지사가 세 번 이상 집을 방문한다.  
개인적을 입양을 할 경우에 가정조사는 $1,000 에서 $1,500가량이 든다. 

 캐나다의 누군가는 이 돈을 받는다. (Someone in Canada receives this money.) 

입양 전에 입양 희망자들은 법에 규정된 절차들을 밟아야 한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부모들에게 어떤 과정을 이수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온타리오주(Ontario)의 "자랑스런 코스(PRIDE course)" 가 있는데 이것을 듣는 데는 약 천불 가량이 된다. 

 캐나다의 누군가는 이 돈을 받는다. (Someone in Canada receives this money.) 

입양산업의 고객 (The Client in Adoption)

입양을 산업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고객이나 소비자가 있어야 한다. 입양산업에서의 고객은 장래의 양부모이다. 대부분 입양 희망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닌,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로 인한 불임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싱글이거나 게이이거나 혹은 임신 보다는 입양을 선호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구원하거나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입양을 하고자 할 것이다.



입양중개인 (The Broker in Adoption)

입양을 산업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입양을 주선하는 사람 또는 중개인이 있어야 한다. 중개인은 정부기관이나 사설 입양기관, 혹은 사회복지사나 변호사, 의사, 지역의 성직자 아니면 심지어는 대리모의 경우에서와 같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이를 구하려고 하는 개인일 수 있다. 보통 중개업자들은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찾아주는 "자선을 베푸는" 일로인한 수수료 또는 기부금을 통해 이득을 얻는다. 영유아들은 어느 곳에서라도 $10,000부터 수십만 불까지 금액으로 팔린다.


입양을 위한 상품 (The Product for Adoption)

입양을 산업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상품이 있어야 한다. 입양 산업에서 팔고 있는 "상품" 은 인간 아이와 "진짜 부모가 된다" 는 약속이다. "제 몸으로 낳은 것과 진배없다" 는 입양 이론은 수백 편의 연구에서 반박되어 왔지만 입양산업은 아직도 입양 희망자들에게 이 이론을 계속 홍보하고 있다. 이러한 고객들이나 소비자 중 일부는 친 엄마로부터 이러한 고객들이나 소비자 중 일부는 친 엄마로부터 "버려졌다" 고 여겨지는 아이를 입양한 "구원자" 란 사실을 즐긴다. 

수요가 가장 많은 아이는 건강한 아이이며 특히 백인아이가 인기가 좋다. 인종학살의 한 방식으로 아기들이 원가족들로부터 분리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호주 원주민과 캐나다의 토착민족의 경우가 그랬다. "원주민" 들을 다른 종족과 교배시켜 사라지게 하고 결국 백인과 구별이 안 가게끔 하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기흡입시대[각주:2] 동안 "미혼모" 에게서 아기를 데려가는 것도 또한 집단 학살과 같은 것이었다. 교회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합법적" 가족에 부합하지 않는 "가족" 의 형태는 모두 없애려고 했다. 


모든 입양 프로그램은 늘 입양이 아이를 위한 최고의 이익인 것처럼 홍보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이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 정체성, 유산 등의 상실로 고통 받으며 아마도 친엄마로부터 거부당하고 버려졌다는 느낌, 버려졌다는 느낌, 상실감 또는 애착장애로 고통 받을 수도 있다. 
"상품" 또는 공급되는 아이는 학대나 방치 또는 장애를 가졌거나 고아인 이유에 보육기관에 맡겨지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입양이다.

그러나 종종 어리고 순진하며 일시적으로 자원이 없는 엄마 또는 겁에 질려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 그런 엄마가 "상품" 의 공급처가 되기도 한다. 그 엄마는 대체적으로 대학생이거나 대학생과 비슷한 상황 또는 높은 사회경제적 배경과 온전한 가정의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덜 유복한 가정환경의 엄마들도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연구들에서 유색인종의 미혼모들은 캐나다에서 입양을 권유하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유색인종들에게는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알려줘서 엄마 스스로가 아이를 키울 수 있게 한다.

어리고 상처받기 쉬우며 임신을 한 어린 엄마나 호르몬의 변화와 임신으로 인한 다른 영향을 받고 있는 여성들은 이용당하기 쉽다. 어떤 엄마들은 인터넷에서 장학금을 알아보던 중 입양기관의 웹사이트에 현혹되어버린다. 일단 여성이 "노출" 되거나 "표적" 이 되면 중개인에게 절대 "입양 보내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어도 중개인을 완전히 떨쳐버리는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일단 중개인이 이 엄마를 표적으로 삼으면, 엄마와 아이를 떼어 놓으려는 영리하고 교활한 상술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엄마가 아이를 출산하기도 전에 일어난다. 입양기관은 엄마의 본능적 사랑을 이용하여 "최상의 계획을 세우고 있음" 을 확신시킨다. 최상의 계획이란 학대당하고 방치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친엄마가 양육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어떤 엄마도 아이를 안고 키울 때 느낄 느낌도, 아이를 입양 보낸 후 느낄 고통도 미리 상상해 볼 수가 없다. 그녀들은 자신의 아이를 안고 보살피는 환희를 미리 상상할 수 없고 아이가 가버린 후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도 알 수 없다. 아무도 그녀와 아이가 입을 심각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다른 공급처는 국제 입양인데 대부분 “미심쩍은” 곳으로부터 아기들이 확보되고 있다. 분명 이 세계에는 부모와 가족이 필요한 진짜 고아들이 있지만 오늘날 입양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의심이 가는 공급처와 신뢰할 만한 공급처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비록 헤이그조약과 유엔은 해외입양을 규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폐단은 일어난다.

입양사기에 관한 1차 보고서에서 유엔 특별조사관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원래 입양은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정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대부분의 경우 아이가 필요한 부부에게 아이를 제공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입양산업은 성장하게 되었고, 매해 수백만 달러의 소득을 올리며, 입양될 아이들을 수소문하고, 서류작업 명목으로 엄청난 수수료를 입양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부과 하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동안 상황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입양은 미국처럼 산업화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캐나다에서 말이다. 그리고 캐나다인들은 "언제 이렇게 됐지?" 하며 의아해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바로 지금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 라는 것이다. 

Copyright Valerie Andrews2009


한국에서도 입양은 꾸준히 진행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 과연 캐나다의 일이기만 할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때문에 캐나다의 입양산업이 미국의 것을 모델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다는 위의 글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 이미지 출처 - babychildrenkids.com, cia.gov, familypreservation.blogspot.com, lyrics-now.com, latestforextips.com, andrewsullivan.thedailybeast.com, allaboutbaby123.com






  1. 서양에서는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전설이 있다. [본문으로]
  2. 과거 서구에서 미혼모에 대한 차별로 미혼모의 아이들은 모두 입양을 보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러한 시기를 “아기 흡입시대(Baby Scoop Era)”라 부른다. 캐나다의 아기흡입시대(Baby Scoop Era)는 2차 세계대전 이후 40만 명 이상의 임신한 미혼여성의 아이들을 단순히 그들이 미혼모라는 이유로 입양을 보낸 시기를 말한다. [본문으로]

 

 호주를 비롯한 많은 서구사회에서는 70년대에 미혼엄마들을 억압하고 게토화 시켰던것 과는 반대로 현재 많은 정책적 지원과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살펴볼 내용은 현재 호주의 입양정책입니다.

요즘에는 호주에서 아이들은 거의 입양보내 지지 않으며 고아원에도 버려진 아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지난 30년동안 꾸준히 감소하여 현재는 일년에 3,4명정도의 아이가 입양 보내진다고 합니다. 또한 해외에서 입양되어 호주로 오는 아이들의 수도 감소했으며 이 수치들은 앞으로 더욱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출산을 앞둔 미혼모가 호주 정부관련 기관에 찾아가 본인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상황이라고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 하면 기관에서는 어떤 문제로 인해 그녀가 아이를 키우지 못할 상황인지 묻고 그녀가 필요한 것이 주거이면 주거를 제공하고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면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며 육아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육아기술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참 부러운 정책이네요 ^^ 

 

 

 

 

제가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정책은 미혼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장차 입양을 원하는 부모와 만날 수 없으며 입양에 대해 의논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입양을 원하는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서 입양동의서에 사인이 된 이후에나 입양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엄마들에게 입양을 고려할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한국에도 제도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임신을 하고 있는 엄마가 자신과 자신의 아이의 평생에 미래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비윤리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임신중으로 상처받기 쉬운 엄마들의 감정 상태는 어느 때나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장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미혼모가 시설에 들어가면 입양상담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전에 입양동의를 할 수 있는 시기는 산모가 출산을 한 후에만 가능하게 바뀌었습니다. 조금씩 사회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앞으로 더욱 필요한 제도와 미혼 모성권을 존중하기 위한 것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자료출처- 오리진스 캐나다 www.originscanada.org

이미지출처-shortsaledailynews.com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nwjddl0104&logNo=120136385856

,tnfamlit.cls.utk.edu , cwti.org , lynhart.ca

written by seul


 

두 사람의 슬픔을 마주하게 하는 재회

 

 


 

 

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는 남몰래 자기만의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도 성장함에 따라 친생부모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자신이 부모와 함께 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인한 친생부모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입양이 이루어지면 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아이를 가슴속에 묻고 잊은 척을 하거나 상처받지 않은 척을 하고 살아가는데 실제로 상실에 대한 슬픔이 없는 것이 슬픔의 극심한 징후라고 하고 잊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감정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친생부모와 입양인이 연락을 하거나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은 더 큰 슬픔을 초래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의 접촉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양보낸 아이와 재회를 한 친생부모들에 의하면 친생부모와 입양인들이 만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억압되었던 슬픔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표현하고 이해할 때 그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해 질 수 있고 자신의 슬픔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Worden에 의하면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에는 4 가지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서로 상실에 대한 현실을 받아 들이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슬픔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서로를 잃어버린 환경으로부터 적응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소모되는 감정적인 에너지를 모아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다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Worden은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수행할 기회가 없을 때 슬픔이 억압되어 표출되지 못한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정확하게 입양으로 이별을 했을 때 일어나는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미혼엄마들은 아이를 직접 양육하는 경우와 입양을 보낸 경우 모두 입밖에 낼 수 없는 슬픔을갖고 살아갑니다. 양육을 하기로 결정한

미혼엄마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여 가족을 꾸릴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겠고 입양을 보낸 엄마들 또한 모성을 인정해 그들이 재회를 할 수 있게 하여 서로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해결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료출처- 오리진스 캐나다 www.originscanada.org

 

이미지출처-

http://trialx.com/curetalk/wp-content/blogs.dir/7/files/2011/05/diseases/Complicated_Grief-1.jpghttp://schoolbuildings.westg.org/westwood/alley/bd05092_1.gif,www.thisnext.com, http://blog.joinsmsn.com/usr/h/y/hyeleem/10/%EC%9E%AC%ED%9A%8C.bmp,http://dialecticmagazine.com/wp-conte nt/uploads/2009/11/grief.jpg

 

Written by seul

 

Adoption and disenfranchised grief

 

 

전통적으로 입양은 미혼모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입양에 대해 조금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입양 보낼 때 아이의 본래 출생과 가족관계 정보를 없애고 새로운 출생 신고서를 만드는데요 이것은 친생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친생부모의 존재를 무시하고 새로운 출생 증명서를 만들어 주면서 우리는 엄마와 아이가 가족을 구성할 권리도 무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이를 입양 보낼 때 가족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이에 대한 모욕이며 다른 모든 가족 구성원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족관계의 단절로부터 입양인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낼 때, 미혼모들이 아이를 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으로 아이를 잃게 되는 엄마들의 슬픔은 사회적으로 전혀 인식되어지지 않고 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엄마들 또한 공개적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며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입양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명목으로 입양산업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지원을 해왔습니다. 반면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들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지원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생모들은 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임신한 것을 비밀로 했던 것처럼 출산을 한 후에도 그들의 감정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입양단체들은 슬픔을 겪고 있는 엄마들을 치유하거나 도우려고 하지 않고 사실상 회피해왔습니다.

 

친생엄마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들은 표현 할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친생엄마들은 점점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지며 감정적인 혼란과 신체적인 병을 얻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건강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며 이 슬픔은 종종 만성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 이러한 슬픔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는 친생엄마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입양으로 인한 아이의 상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입양으로 헤어진 가족의 구성원은 그들의 상실을 인정해야 그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고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사회에서는 입양의 이면에는 아이를 잃고 슬픔과 후회로 살아가는 친생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입양은 간단한 해결 방안이라기 보다는 입양인들을 포함한 친생부모까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치유하지 못하기도 하는데요과연 입양이 미혼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일까요??

 

 

이미지출처

www.adoptionblogs.com/.../thumb_GriefPart1.PNG

staffordshiresocialservices.wordpress.com

www.adoptionblogs.com/.../LossAndSupport.PNG

 

내용출처

오리진스 캐나다 www. originscanada.org

 

written by Se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