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rginia legalizes discrimination against unwed moms    

 

If you're a single mom in Virginia, you may be legally turned away by a genetic counselor and you can't sue for discrimination. Yes, it's still 2014. What gives?

 

만약 당신이 버지니아의 싱글맘이라면, 유전 카운슬러에 의해 합법적으로 쫓겨날 수 있다. – 그리고 그 차별에 고소할 수 없다. 그렇다. 이것이 2014년의 현실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WITHHOLDING TEST RESULTS NOW OK

시험결과의 보류를 허용

Virginia has snuck in legislation that allows genetic counselors to refuse service to those who are in conflict with their religious beliefs such as unwed moms. Also, test results can be withheld if a medical professional suspects the pregnant woman will seek abortion based on the results. And guess what? It passed. It's now a law.

 

버지니아는 유전 카운슬러들이 미혼모와 같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충돌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비스를 거절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을 몰래 상정했다. 또한 그 법안은 전문 의료진들에게 임신 여성이 그 결과를 토대로 낙태를 요구할 것을 의심할 때, 시험 결과는 보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어떻게 됐을까? 통과되었고, 지금은 하나의 법률로 있다

 

 

Legalized discrimination

합법화된 차별

Both Kansas and Arizona have recently been in the national spotlight, and not in a positive way. In both states, legislation was passed which allowed businesses to refuse to serve people based on their religious preferences essentially, they would have been able to discriminate against the LGBT population, or anyone else who didn't live their lives according to their religion. "The law also shields genetic counselors from discrimination lawsuits."

 

최근, 캔자스와 애리조나 모두 전국적으로 부정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두 주에서는 그들의 종교적인 이유로 어떤 사람들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LGBT나 그들이 따르는 종교에 맞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차별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법은 차별 소송에서 유전 카운슬러들의 방패막이 된다.”

 

Fortunately, in both cases, the governors in those states vetoed the bill, but Virginia has managed to get a new law that legalizes discrimination signed by their democratic governor, Terry McAuliffe.

 

 

다행스럽게, 두 주의 주지사 모두 해당 법안을 거부했지만, 버지니아의 주의회는 민주당 주지사, 테리 마콜리프에게 차별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Now, if you're a single mom or a member of the LGBT community in Virginia (or of any other population that can be objected to on religious grounds), then they can say, "No thanks," and point you in a different direction. And just as scary, if they suspect you might choose to end a pregnancy based on test results, they can keep that information from you (although they are not allowed to lie if directly asked). How is this OK?

 

이제 만약 당신이 싱글맘, 혹은 버지니아의 LGBT커뮤니티의 멤버(혹은 종교적 바탕에 따라 거부

수 있는 어느누구라면) 그들은 됐어.” 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방향으로 당신을 내몰수 있다.

또한 무서운 것은, 당신이 시험 결과에 따라 임신을 포기할 것이라고 의심을 할 때, 그들은 (직접물으면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할지라도) 그 정보를 당신에게서 차단시킬 수 있다. 어떻게 이게 괜찮을까? 

 

 

Frightening legislation

무서운 법률

 

While the nation was focused on Kansas and Arizona and the sweeping laws they tried to pass, Virginia legislators sponsored two bills that saw little debate and quietly became law. Where was the outcry over this? How could something that goes against human decency be passed with so little debate?

 

국가에서 캔자스와 애리조나, 그들이 통과시키려 하는 광범위한 법안에 집중하는 동안, 버지니아의 의원들은 단기적 토론을 통해 두 가지 법안을 발의했고, 그 법안들은 조용히 법이 되었다.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디에 있었을까? 인간의 품위에 어긋나는 법안이 어떻게 아주 작은 토론만으로 통과될 수 있었을까?

 

Genetic counselors are medical professionals who guide hopeful parents through pregnancy planning, helping them determine the chances of genetic disorders and ordering prenatal tests to check for fetal abnormalities. As medical professionals, they have a position in our community to uphold their training and use it to help people — and they should not be allowed to pick and choose not only who they help, but what information they share.

 

유전 상담사들은 희망적인 부모들이 유전 질환의 가능성에 대해 파악하도록 돕고, 그들에게 태아의 이상을 확인하기 위한 산전 검사를 권하고, 출산 계획에 따라 그들을 안내하는 의료 전문가이다. 의료 전문가로서, 공동체 안에서 배운 원칙을 지키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는 것 뿐 아니라 어떤 정보를 공유할지를 선택하여 뽑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To add to your mind-boggle, the law also shields genetic counselors from discrimination lawsuits, even in cases where physical harm results from their actions.

 

매우 놀라우면서도 믿기 어려운 사실을 당신에게 추가로 말하자면, 심지어 유전 상담사들의 행동으로 인해 신체적인 손상이 발생한 경우에도, 법은 유전 상담사들을 차별 소송으로부터 보호해준다.

 

 

A nation going backwards

후퇴하는 국가

So, if your prenatal test results indicate your fetus has a fatal abnormality, the genetic counselor can elect to not share that information to let you make the choice yourself. It can just be a big surprise on delivery day. Doesn't that sound grand? And if you're a single woman or in a lesbian relationship, this medical professional can decide to not work with you at all. A transgendered man? Same deal.

 

그래서, 만약 당신의 산전 검사 결과가 당신의 태아에게 치명적인 장애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유전 상담사들은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기 위해 그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출산일에 큰 놀라움이 될 것이다. 숭고하게 들리는가? 그리고 만약 당신이 미혼 여성이거나 레즈비언이라면, 그 의료 전문가들은 절대 당신을 위해 일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트랜스젠더라도 마찬가지이다.

 

This law's passage indicates that instead of going forward as a nation and treating everyone as an equal adult, we are sliding backwards. Although the bills in Kansas and Arizona lost steam, that doesn't mean that similar bills aren't waiting to be introduced there, or in other states. The last time I looked, the U.S. was not a theocracy. Those who serve the public should not be allowed to use their religion to decide who they will deal with or what information they choose to share — end of story.

 

이 법안의 통과는 국가가 진보하며 모든 사람을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는 것 대신에,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캔자스와 애리조나에서는 이 법안들의 열기가 식었지만, 비슷한 법안들이 그 두 개의 주나 다른 주에서 소개되기 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미국이 신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종교가 어떤 사람을 그들의 고객으로 대할지, 무슨 정보를 공유할지 결정하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토론할 여지가 없다.

 

 

 

출처:http://www.sheknows.com/parenting/articles/1033531/virginia-legalizes-discrimination-against-unwed-moms

 

Kathryn Joyce: The Purpose-Driven Nation  By Kathryn Joyce  April 22, 2013

목적이 이끄는 국가 

<릭 워렌은 미국 스타일의 복음 전도와 입양이라는 복음을 르완다에 수출하고 있다.> -

Excerpted from The Child Catchers: Rescue, Trafficking and the New Gospel of Adoption

[The Child Catchers: Rescue, Trafficking and the New Gospel of Adoption]에서 발췌

2005, 당시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1994년 르완다 대학살을 끝내는데 일조함. 논란이 많은 군사 지도자)는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의 교훈을 실천하게 하기 위해 그 저자인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를 초청했다. 워렌의 책은 세계 각지와 마찬가지로 르완다에서도 유명했고, 르완다 현지어로 쓰여진 복사본이 10만 권 넘게 배포되었다. 르완다에서의 프로그램은 워렌의 P.E.A.C.E. 계획에 대한 야망을 바탕으로 했다. 그 계획은 마치 선교 제국처럼, 세계적인 개발 작업의 최전선에 지역 교회를 배치하고, 정부의 사회 지원을 늘리거나 대체하기 위해 훈련된 교회 자원봉사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르완다 프로그램은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르완다의 지역 마을에 기초적인 의료를 지원하기 위해 교회에 기본 구급약품 등을 기부하는 상자 안 병원과 같은 계획 된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시민들을 돕고, 정부의 짐은 덜어주며, 동시에 의료를 제공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신뢰는 높여 대중에게 전도하는 세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르완다에서 새들백 교회 사업의 구성요소 중 하나가, 신도 2만명을 가진 워렌 목사의 그 교회의 주요 사명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것은 고아 돌봄과 기독교인으로서 입양할 의무였다. 워렌 목사는 이를 단지 과제가 아니라, “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성경과 사회의 명령으로 설명했다.

폴 카가메: 로이터신문 발췌

 

단지 몇 달 만에 80만 명 이상이 죽은 르완다 대학살 이후, 가족은 파괴되었고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다. 이 아이들 중 일부는 노예와 비슷한 상황에서 친척이나 다른 국내 입양자에게 보내졌다. 고아를 데려간 르완다 가족 중 일부는, 폭력을 목격한 것과 가족을 잃은 것에 의해 트라우마가 있는 아동의 행동에 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아이들이 대학살을 계기로 만들어진 새로운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르완다 양성가족진흥부 전 장관인 이념바 알로이시(Inyumba Aloisea)는 새들백에서 열린 고아를 위한 기독교인 연맹 2012년 회담에서 워렌에게 우리나라는 50만 명의 고아가 곳곳에 흩어져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1996년에 국가가 104개의 고아원을 운영했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목사님, 솔직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모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http://dok.do/jCBgKe)

알로이시 장관이 새들백에서 연설을 했던 2012, 르완다는 고아원의 수를 약 34개까지 줄였다. 그리고 그 고아원에 있는 아동의 공식적인 수는 겨우 3,000명을 넘는 정도였다. “르완다는 전세계에서 고아와 고아원이 없는 첫 번째 국가가 되려고 한다.” 워렌은 무대에서 뽐내며 말했다. “르완다에 남은 고아는 3,050명이 전부입니다! 50만명 중에서! 어떻게 했는지 오 분 안에 가르쳐주십시오. 저는 모든 나라에서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전세계에서 기독교인의 수는 고아의 수를 한참 넘는다. 그래서, 문제는 실천하는 것뿐이다.

이는 새들백 교회가 이미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공동의 노력에 이용될 잠재적인 준비가 되어있던, 통합적이고 세계적인 기독교인 단체의 고아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독교인 입양 운동의 방안과 같은 전제에 기초한 것이다. 전세계 수억의 고아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 방안은 아마도 입양이라는 것이다. 이 해결책은 공식처럼 발표되었다. “전세계에서 기독교인의 수는 고아의 수를 한참 넘는다. 그래서, 문제는 실천하는 것뿐이다.” 2012년 회담에서 새들백의 에이즈와 고아 돌봄을 위한 계획의 설립자이자 감독관인 엘리자베스 스티프가 누가 고아 문제를 끝낼 것인가? 바로 교회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미국에는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를 합친 것보다 많은 교회들이 있어요.” 스티프는 내게 말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1년 동안 풋볼, 농구, 아니면 다른 스포츠 이벤트를 보는 모든 사람들보다 지난주 교회에 간 사람이 더 많죠. 그러니까 여기엔 노동력이 있는 겁니다. 전세계에서 도시 정부나 학교가 없는 곳이라도, 교회는 있을 거에요.”

카가메의 목표는 르완다를 중앙아프리카의 싱가포르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워렌의 영향력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릭 워렌: 네이버인물정보 출처

개인적으로 독실하지는 않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카가메는, 새들백 선교사들의 유례없는 접근을 허용하는 대가로 새들백의 개입이 르완다로 투자자들을 유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의 목표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일컫듯이 르완다를 중앙아프리카의 싱가포르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워렌의 영향력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워렌은 카가메의 대통령 자문 위원회에 합류했고, 르완다는 첫 번째 목적이 이끄는 국가로 칭송되었다.

입양을 위한 국가 평의회의 척 존슨은 나에게 나는 그 전까지 정부가 종교적이든 아니든 어떤 사적 단체와 매우 가깝고도 개방적인 진정한 파트너가 되는 이런 종류의 상황은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미국 국무부가 미국 입양 로비스트들에게 부여한 발언권 등을 언급하며 여기 미국에는 공적인 파트너쉽이 많다. 하지만 르완다와 새들백의 파트너쉽은 르완다를 영어권의, 기독교 아프리카 국가로 만들려는 국가 건설 계획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카가메가 워렌의 복음보다 그가 가져올 비즈니스 연합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따라 수천의 자원봉사자들 또한 오렌지 카운티의 새들백에서 중앙 아프리카의 거대 호수 지역으로 왔다. 결국, 새들백의 P.E.A.C.E“P” 계획은 애초에 교회 세우기(Planting churches)”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P”계획이 르완다에서 특히 잘 퍼지는 메시지인 화해를 촉진하는 교회 세우기로 업데이트되었을지라도, 모든 화해는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시작된다고 새들백은 주장한다.

(참고:  PEACE 전략이란 지역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연합을 만들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화합을 증진하는 교회를 심고(Plant churches), 섬기는 리더들을 세우고(Equip servant leaders), 가난한 자들을 돕고(Assist the poor), 아픈 자들을 돕고(Care for the sick), 다음 세대를 교육한다(Educate the next generation))

그 메시지는 또한 르완다가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였다. 가톨릭 지도자 중 일부가 대학살에 가담한 것이 밝혀지고, 피난처를 찾던 사람들이 도피를 위해 간 교회 안에서 살해당한 끔찍한 대학살로 가톨릭 교회들이 대학살의 현장이 된 후, 미국 스타일로 재 탄생한 기독교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르완다를 휩쓸었다. “우리는 대학살 전, 우리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는 통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대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새들백의 P.E.A.C.E. 계획 르완다 사업의 사무총장인 에릭 무녜마나는 내게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이든 선교자가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아메리카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여기서 할 수 있어요.”

많은 르완다인들이 분명히 동의한다. 오늘날 르완다는 극도로 복음주의적인 국가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르완다의 공항과 호텔을 점령하고, 키갈리 빌딩의 지붕들은 거대한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교회 신도라는 것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소개할 때 중요한 점이다. 효과는 어디에서나 명백하다. 이용객은 적으나 잘 운영되는 키갈리 공항에서, 르완다의 싹트는 호텔 산업 안에서, 훈련 받는 오클라호마에서 온 대졸 청년 선교사들은, 투옥된 르완다의 집단학살자를 돌봐온 나이든 오레곤의 부인과 자신들의 경험을 나눴다. “여기엔 많은 빛이 있습니다.” 청년 선교사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나이든 선교자가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미국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여기서 할 수 있어요.”

출처: 르완다 대학살 때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돼 2004년 개봉한 영화 '호텔 르완다'의 한 장면. 부산일보

 

그러므로 새들백이 고아와 입양이슈를 우선순위로 한 것이 르완다에서 큰 영향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티프를 포함한 새들백의 직원들은, 르완다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입양한 첫 번째 가족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르완다 영국 국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며 P.E.A.C.E. 계획의 파트너인 엠마누엘 콜리니 대주교는 새들백을 3번 방문하면서 새들백의 명성이 개인입양신청을 도왔다고 믿고 있다. 콜리니는 릭 워렌은 유명합니다라며 그리고 르완다 정부는 새들백을 믿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르완다 정부의 공무원들은 양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지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국제적 입양 프로그램에 대한 2012 새들백 컨퍼런스 참여자의 지지와 르완다의 정책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었다. 그 컨퍼런스에서 워렌은 내가 고아 관리를 말할 때, 입양이 첫 번째고, 두 번째고, 마지막이다.”라고 연설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이 일관된 메시지와, 르완다의 입양 시장에도 거대한 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 풍부한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입양은 크게 늘지 않았다. 대신, 르완다의 정부는 입양 과정에 대한 밀착 관리를 유지했고, 각각의 케이스를 면밀하게 조사하면서 입양 희망 부모가 그들이 왜 르완다의 아이들 중 한 명을 입양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도록 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여기 르완다에 남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르완다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르완다는 외부인들이 아프리카의 가장 큰 성공 스토리로 부르는 꽤 조직적인 국가이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절망적으로 가난한 다른 나라의 혼란, 부패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이러한 통제의 수준은 근대 르완다의 상황에서 크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 정부는 민족 구분을 금지하는 대학살 후의 법을 핑계로 야당 언론과 반대 의견을 진압하였고, 대선은 영국 주간지 The Economist에 의해 엉터리로 부정되었기 때문에, 대중의 삶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관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정권의 정책에서 나온 긍정적인 효과는 여러 다른 분야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르완다는 여성이 의회의 반을 차지하는 나라이다. 르완다에서 부패는 굉장히 드물고, 뇌물청탁은 신속히 잡혀 양쪽이 모두 수감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공동 청소 날에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르완다인들은 쓰레기를 줍게 되어있다. 

또한, 2011년 양성가족진흥부(MIGEPROF) 장관의 사무실에 방문하는 동안 분명하게 느꼈듯이, 르완다는 관료주의적인 절차의 엄격함이 부조리한 분위기를 띨 수 있는 곳이다. 바람이 잘 통하는 언덕꼭대기에 위치한 그들의 실용적인 사무실 복도에서, 까탈스러운 고위급 공무원들은 입양 사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요과잉으로 보이자 고개를 저었다. 양성가족진흥부의 해외정책을 맡고 있는 아동보호공무원 베닐드 우와바볘이는 대기 부모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가리키며, “우리는 거대한 수요를 가지고 있지만, 입양 가능한 아이는 매우 적다.”라며 항의했다. 대기 부모들은 대부분 미국인이며, 우와바볘이가 불신을 나타내며 특별히 언급했듯 한 명 이상의 아이를 원한다.

2011, 나라에서 오직 한 고아원만 아이를 입양 보낼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희망의 집이라는 그 작은 고아원은 마더 테레사에 의해 세워진 가톨릭 단체인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고 있고, 그 곳의 복도는 우리는 입양으로 낙태와 싸운다!”라는 큰 영문 포스터로 장식되어 있다. 이렇게 한 고아원만 입양이 가능한 것은 절차 상의 이유 때문이다. 르완다 고아원 중 희망의 집만이 경찰조사를 거쳐 아이가 법적으로 버림받았음을 신고하는 정해진 절차를 이행했기 때문에 그들은 입양 보낼 자격이 있었다. 르완다는 가족이 있는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것을 불허한다. 그리고 입양되는 아이들은 살아있는 친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그들 가족관계를 조사해야만 한다. 규칙들은 엄격하게 실행된다. 캘리포니아의 어떤 커플이 고아원에서 만난 소녀를 입양하길 원했을 때, 그들은 거절당했다. 왜냐하면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생모가 살아있고, 그것은 소녀가 엄마를 알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와바볘이는 르완다가 정책에 의해 국제입양을 가족이 재결합하거나 국내 입양자들을 찾으려는 노력이 고갈된 후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이 곳, 르완다에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그 아이들은 르완다 국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르완다 문화 안에 머물고 르완다의 가치관을 배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캠페인을 추진하는 이유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말한 캠페인은 국내 입양을 촉진하려는 정부의 초기 노력이다. 르완다의 영부인 쟈넷 카가메(Jeannette Kagame)의 임부토(Imbuto)재단의 후원 하에 이뤄진, '모든 아이들을 우리 자신의 아이처럼 대우하자'고 촉구하는 일련의 광고를 통해 대중들이 이 캠페인을 처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국제 기구들은 르완다의 메시지를 들었다. "우리는 현 양성가족진흥부 장관이 입양을 몇몇 경우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면서, 국가 간 입양을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양성가족진흥부와 일하는 UNICEF 소속의 다미엔 응가본지자는 말했다. "그들은 아이들이 불필요하게 입양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분적으로, 르완다의 조심스러움은 좋지 않은 최근 경험들의 결과다. 1994년에 있었던 대학살의 혼란기 동안, 소수의 아이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로 보내어졌다. 아이들 중 일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던 절망적인 부모들에 의해 양육권이 포기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필사적으로 원아들을 구하려 했던 고아원 직원들에 의해 비상 탈출 기간 동안 그 나라들로 보내어 지기도 했다. 좋은 결과도 있었지만, 나쁜 결과도 있었다. 이탈리아로 입양된 몇몇의 아이들의 경우, 절대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르완다의 가족들과 다미엔 응가본지자를 포함한 정부 대표들이 아이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거부 당했다. 대학살 이후 초반에 그는 밀라노에 있는 아이들을 방문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우리가 아이들과 말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 우리가 아이들을 다시 데리고 가려고 노력해 봤지만 허사였다. 그 아이들은 10년 즈음 후면 그 곳에 정착해 있겠지만, 자신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아이들의 부모 중 일부는 살아 있고 자기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할 것"이라고 응가본지자는 말했다.

몇몇 정부 관계자는 개인적 이유로 입양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어떤 양모가 들은 바에 의하면, 한 정부 관계자는 그녀의 아이들을 대학살 기간 동안 잠시 잃어 버렸는데, 얼마 후 부룬디의 이웃 나라에 있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찾았다고 한다. 그 엄마는 "그 정부 관계자의 입장에서는 공개 입양 정책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만약 그녀의 아이들이 영원히 나라를 떠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반문했다.

가족보호와 가정위탁에 힘쓰는 비영리 기관인 SOS Chidren's Village 르완다 지부의 대표 알프레드 무녠트와리는 학살 기간 중에 이뤄진 즉흥적 입양이 많은 르완다 사람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동의했다. 2006년에 그는, 학살 기간 부모와 떨어진 후 7살 때 독일 가족에게 형제와 함께 입양되었던 19살 여성의 보호자의 연락을 받았다. 그 당시 아이들과 홀로 남은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인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입양된 딸이 성인이 되어 자신의 뿌리를 되찾고자 무녠타와리의 보호 아래 르완다로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입양 때문에 부모가 이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엄마는 '아이들을 팔아 넘긴' 아빠를 비난했고 그의 이웃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의 엄마와 이웃들이 "당신은 끔찍하고 어리석다"고 말했다고, 무녠타와리는 회상했다. "차라리 소를 팔지 어떻게 아이를 팔 수가 있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돌아와 자신의 오명을 씻어 줄 때까지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다. "이 이야기는, 종종 아이들이 입양 갈 수 있고 그들은 입양갔을 때 향수병을 앓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무녠타와리는 내게 말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잘 제공받는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도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지는 못 한다".

무녠타와리는 "일부 국가에서는 입양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르완다에서는 오직 신만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결론 내리면서, ‘르완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나라를 떠난 후에 잘 지내는지 여부를 알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주장했다. "'르완다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은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 처할 수 있고, 내 아이들을 교육시킬 능력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내일은 더 나아질 수도 있다.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내 아이를 데려가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내 아이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Ingrid’s Adoption Story – Calgary, Alberta, 1960


잉그리드의 입양 이야기-캘거리 알버타(Calgary, Alberta), 1960

 우리는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다.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그들은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나에게서 바로 빼앗아갔다.

나는 14년 전 내 딸과 재회를 했고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세 아이의 할머니가 되었다. 내 딸은 크랜부르크(Cranbrook)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까지 4번 방문을 했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쓰고 전화통화를 한다. 우리는 훌륭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내 딸을 찾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뒤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50년대 말, 60년 대 초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몇은 대부분의 어린 미혼모들이 아기에 관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어린 미혼모들이 해야 하는 그 선택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선택권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 아기를 기르는 것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으로 없었으며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에 대해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의 의도는 부정적으로 혹은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아이를 포기했었어야만 했는지, 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몇몇의 입양아들은 어머니들이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느낀다. 나는 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분노는 여성들이 임신을 했을 때 거의 어떤 선택도 주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적 태도가 만연했던 시대로 향해야 한다. 많은 생모들 대부분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의 분노, 수치, 죄책감의 근본을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위한 길이다.

클라리사 핀콜라 에스트(Clarissa Pinkola Este)늑대들과 달리는 여자(Women Who Run With the Wolves)”라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여자들의 인생을 억압하는 것 들 중에서 가장 이야기 되지 않았던 것은 북미를 포함한 전세계에 있는 미혼모에 관한 것이다. 이 미혼모들은 이 한 세기 동안에만 문화적 관습에 의해 그들의 상태 혹은 그들의 아이들을 숨기도록, 심지어는 그들의 자식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난 받고 영향력을 박탈당한 시민으로서의 반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몇 세대 동안 여자들은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합법적인 인간이 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남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해왔다.”

이 인용문은 중세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이것은 20~30년 전 시대에 팽배했던 일반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여자를 소유했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아이를 소유했다. 만약 여자가 남자 이름의 허가 없이 임신을 했다면 그녀는 사회로부터 비난 받았고 아이는 합법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만 사회의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이도 같이 받은 것이다. 여자와 아이는 사회의 버림받은 자, 즉 고상하지 못한 피해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다. 더 심한 단어로 하면 창녀와 사생아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십대였을 때 나는 이 사고방식에 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관습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그런 방식이었다. 만약 여자가 규율을 어겼다면 그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복도에서 6개월 혹은 1년 간 비밀리 사라진 여자아이들에 관한 수군거림을 기억한다. “그 애는 임신했어.” “애를 낳으러 떠난 거야.” “그 여자아이는 형편없어.” “마을에 어느 누구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 부끄럽지만 나도 같이 험담을 했었다. 나는 그런 나쁜여자아이들에 비해 내 자신을 우월하다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여자아이들이 겪었을 고난, 고통,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아기의 운명에 관해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 여자아이나 아기를 향한 어떤 연민이나 동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쁜 여자아이들이었고 그들은 비난받을 만 했다. 나는 우월함을 느꼈고 착한 여자아이였다.

50, 60년대 고등학교 생활에서 (적어도 나의 작은 마을에서는) 나쁜 여자아이들은 갈 데까지 간 것으로 인식되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착한 여자아이들은 들키지 않았다. 그 때는 콘돔을 제외한 피임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넘어온 것을 자랑했고 그들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가 더 많은 훈장를 얻을수록 더욱 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나쁜 평판을 받았다. 이중적인 기준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여자아이를 술에 취하게 하거나 그녀가 넘어오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감정 협박을 함으로써, 그들의 데이트 상대 혹은 여자친구에게 가차없이 섹스를 강요했던 남자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데이트 강간도 있었다. 데이트 강간은 정확히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흔한 것이었다. 그와 홀로 있었던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남자친구와 키스한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등등. 남자아이들은 비난 받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책임이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품위 있고 도덕적인 젊은 남자들을 옹호하자면, 여자아이가 임신을 했을 때 책임감을 느끼고 옳은일을 했던 몇몇 남자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그들은 그 여자아이와 결혼하였다. 이런 결혼을 샷 건(shot-gun, 속도위반)” 결혼이라고 불렀다. 몇몇의 남자아이들은 옳은 일을 하고 여자아이와 결혼하도록 그들의 부모나 여자아이의 부모에게 강요 받았다. 이것은 결혼의 좋은 기반은 아니었다.

, 사회는 남자아이들의 본능은 허락했지만 여자아이들은 결혼 할 때가지 처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저 섹스를 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심지어 섹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섹스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식에서 맹세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하루 밤 만에 성()의 요정으로 변신해야 했다. 따라서, 우리 중 몇몇은 감정 협박에 굴복했고, 몇몇은 강간으로 고통 받았고, 몇몇은 술에 취해 이용당했고, 그리고 몇몇은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사랑스러운 품을 저항할 수 없었다. 흔한 수단은 네가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했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은 사람은 우리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6살 때 임신을 하였다. 공포 중의 공포, 나는 그들중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알다시피, 매춘부, 부랑자, 창녀, 쉬운 여자가 된 것이다.

나는 수치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내 자신, 부모님에게 수치가 되었으며 평판 또한 떨어졌다. 또한 가문의 이름에 수치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이 나와 의절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복 동생이 있다는 생각에 신나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는 부정한 여자기 때문에 그 아이와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비서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11학년이었는데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고 그 곳에서 속기사와 접대원의 일을 얻었다. 나는 나이를 속였고 혼자 살았다. 일하고 돈을 모으면서 고향 사람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까봐 늘 두려웠고 너무 수치스러웠다.

 나는 캘거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한 충분한 돈을 모았고 사회 복지 센터에 연락을 하였다. 나는 숙식의 대가로 몇몇 가정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크레체 주(The Providence Creche)라는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가톨릭 시설에 배정되었다. 이곳에서 우리의 수치심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외출할 때마다 낄 결혼 반지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익명을 사용해야 했다. 나는 케이티 프루든(Kathy Pruden)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내 생각에는 프루든이라는 이름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이름이 나의 더러움을 없애고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줄 것처럼 말이다. 미혼모 시설의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도시 밖 출신이었고 아무로 서로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숨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을 숨기도록 지시 받았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슬픔과 혼란을 느꼈다. 우리는 수녀들에게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 아무도 우리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도 겪을 상실감, 슬픔,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진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었다.

나는 한밤중에 진통을 느꼈고 수녀 한 명을 깨워야 했다. 그녀는 홀리 크로스(Holy Cross)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고 나 혼자 두고 떠났다. 출산하는 동안 사무적이고 냉담한 직원들이 나를 돌보았고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빼앗아갔다. 내 곁에서 정신적인 지지나 친절을 보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간호사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아기를 데려다주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에게는 미소와 부드러운 속삭임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침대를 지날 때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내 아기를 볼 수 있냐고 질문했고 그들은 내가 딸을 포기했으니 아기를 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차갑게 대답하였다. (나는) 복도를 서성이며 내 딸을 알아볼 수 있을까 바라며 육아실을 훔쳐보았으나 눈에 띄자마자 쫓겨나곤 했다.

내가 병원을 떠나기 바로 전 아기를 볼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그들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15분동안만 허락 해주었다. 마침내 내 딸을 안아볼 수 있었고, 간호사가 갑자기 들어와 아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나는 내 딸의 작고 예쁜 얼굴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를 찾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입양으로 내 딸을 포기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변했으며 그 일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슬픔은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는 다양한 자해행동으로 나타났다.

수치심은 나의 자존감에 영향을 주었다. 수치심은 내가 모든 것을 부인하게 했으며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평판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내 가문의 이름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이 깊고 어두운 비밀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나는 상실감과 슬픔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비극적인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던 그 시대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시대와 사고방식이 변화해왔다. 사회는 더 인도적으로 변화했다. 미혼모들은 나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선택하기 힘들지라도 미혼모들에게 선택권이 있다. 여자들은 슬픔의 과정을 겪을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인정받고 허락되었다. 미혼모들은 제도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오늘날의 많은 어머니들이 몇몇의 우리가 겪었던 것을 겪지 않는 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그러나 이런 이슈에 대한 일반 대중들과 특히 입양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이 그것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견해에 따라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규율에 기초하여 그 시대의 사회 사고방식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우리는 규율을 어긴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치유를 위한 한 방법이다.

 

추신:

30년이 지나고 요청을 하자, 알버타 주정부 공공복지부의 어린이 복지 지부로부터 포기 신청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딸이 태어난 뒤 겨우 5일이 지난 후 병원을 떠나면서 신청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calgary-alberta-1960/

강제입양 국가 사과에 대한 Origins(호주)의 비평

 

“우리는 이 여성들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호주 수상 줄리아 길리아드, 2013년 3월 21일)

 

줄리아 길리아드 총리와 토니 아보트 야당 총수는, 2013년 3월 21일 캔버라 국회 의사당에서 강제 입양과 낙태 피해자들에게 호주 정부를 대표해 사과를 표명했다.

 

강제 입양의 희생자들은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고 그들을 학대한 이들을 언급하는 데에 굉장한 용기와 도덕성을 보여줬다. 오리진스(생모를 위한 호주의 NGO 단체)는 직접, 또는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여 준 모든 이들과 열과 성을 다해 온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리진스는 그동안 고통받으며 이와 같은 인정과 사과를 받기까지 기다려 온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이는 매우 자랑스러운 성과이다.

 

길리아드 총리는 “오늘 호주 의회는, 호주 국민을 대신하여, 오랜 시간 고통과 괴로움의 유산이었던 아기와 엄마를 강제로 분리시킨 정책과 관례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사과하는바”라며, “깊은 슬픔과 후회의 마음으로, 우리는 여러분에게 전적인 사과를 표하는 동시에 신념과 우애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고통 받아 왔음을 알고 있다. 강제 입양은 고통의 이야기이자 참을 수 없는 손실이다. 우리는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진스는 길리아드 총리와 토니 아보트가 책임을 지고자 하는 용기와 리더십, 인간애, 위엄을 받아들이며 감사했다. 이것은 정당 정치를 넘어선 인권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정부, 호주 사회의 몇몇 분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총리의 연설에 보상이나 연금 등은 포함 돼 있지 않지만, 정부가 위법을 인정한 것이다. 오리진스는 이번 국가적 차원의 사과가 강제 입양된 사람들과 생모들을 위한 정의 구현에 있어 상당한 권한과 영향력이 부여될 것으로 기대한다.

 

The Apology

 

이번 총리의 국가적 사과는 어머니와 아버지, 아이들, 다른 가족 구성원들, 권리를 빼앗긴 채 죽어간 희생자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매우 광범위한 시인이자 인정이다.

 

총리는 “이 순간을 함께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여기 없다는 점이 슬프다”며, “특히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길리아드 총리는 어머니들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머니로서 대우받지 못했으며,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대우에 고통 받은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낙인과 죄책감, 약물, 사기 등으로 힘들어 했다. 또, 압박과 위조 동의, 사기, 비도덕적인 강압, 배척, 파괴적인 판결, 용서받을 수 없음,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에서도 어려움에 시달렸다.

 

“교회와 자선단체, 가족, 의료진, 정부 관료들은 가장 원시적이고도 신성한 관계인 엄마와 아이의 유대를 깨뜨렸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집에서 자랐다.” 총리는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한 사회의 공공연한 폭력의 오만”을 인정하며 “이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고 말했다.

 

총리는 강요로 헤어진 가족들이 혈통의 커뮤니티와 문화, 원가족의 정보와 관계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기만당하고 부정되었음을 언급하였다. 그녀는 자아 정체성과 자존감, 유기, 손실, 감정적 충격, 두려움, 불확실함, 불안, 자기 태만, 분리, 억눌림, 입양 부모 또는 기관, 동료로부터의 학대에 맞선 그들의 투쟁을 인정했다.

 

그들은 “결코 엄마의 따뜻함을 느끼거나 엄마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 상처는 성인기에도 남아 있다.” 총리는 가족 간의 재결합을 위한 시도에 대해 언급했다. “강제 입양된 아이들에게 우리는 여러분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을 만하다.”

 

국가적 사과는 아버지들 또한 외면당하고 인정받지 못했으며, 압박감, 상실감 등으로 고통 받아 왔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출생증명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수치심과 용서의 장막 또한 그들의 삶을 뒤덮었다.

 

총리는 강제 입양에 영향을 받은 형제와 자매, 조부모와 다른 친척들 또한 잊지 않았다.

 

강제 입양과 강제 이주는 호주 토착민을 포함한 모든 문화의 호주 출생자와 이민자들에게 일어났음을 언급하였다.

 

 

야당 대표인 토니 아보트 역시 엄마와 아이의 기본권이 잔인하게 부정된 점, 가족과 자선단체가 생모와 아이에 대해 억측한 점 또한 인정했다. 그는 잘못되고 해로운 정부 상황이었다는 점과 함께, 미혼 여성들에게 합법적으로 빚진 사회 보장 혜택을 추가로 인정했다.

 

아보트는 “그들은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의 지원을 받았어야 했다. 우리는 고통을 가했다”며, “그것은 결코 선의만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강제 입양을 주장해온 사람들은 더 잘 알았어야만 했다. 우리가 그때 알았어야만 했다”고 했다. 사랑과 지원, 축하, 정의 대신에 비난과 거절, 침묵, 부정행위가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 슬픔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수년간에 걸쳐 이 부당함이 그들을 짓밟지 못하도록 하면서 우리의 실패를 폭로하려는 단호한 투지를 보여준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늘 우리의 용기는 승리했다.”

 

아보트는 아이들을 잘 키우려 노력해 온 양부모들도 있음을 인정했지만 잘못을 저지른 양부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총리는 “우리는 유감을 표함으로써 역사적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상원위원회의 의견이 호주 정부가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용기를 인정했다.

 

캔버라에 모인 800명의 사람 중 일부는 눈물을 흘렸고, 일부는 총리에게 고마워했다. 어떤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관행’에 대한 사과 발표가 끝났을 때 서서 환호를 보냈다.

 

호주 상원은 약 22만5천명의 아이가 강제 입양을 당했음을 밝혀내었다.

 

사과를 공식화하는 움직임은 하원과 상원 모두에서 일어났다. 호주 국민을 대표해 의회는 책임을 지는 것과 함께 강제 입양과 강제 이주 정책 및 관례에 대한 사과 입장을 표명했다.

 

The promises (서약)

 

Gillard 총리는 아이가 부모를 알 권리와 부모에게 양육되어져야 할 권리를 인정하며, 호주에서 다시는 강제 입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호주 정부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한 자원을 제공할 것을 맹세하며, 전문가 상담 서비스와 지원, 기록 추적을 원활히 하기 위한 5백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 강제 입양 피해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데에 5백만 달러가 추가로 사용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서비스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Origins는 이러한 지원금이 실제 더 나은 서비스를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들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유롭게 기록을 열람함으로써 진실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가족들과의 재결합을 돕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는 의료 기록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은 포함시키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국립 보존 기록관이 강제 입양된 피해자들의 경험을 기록하는 데 150만 달러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강제 입양의 역사가 “다시는 잊혀지거나 하찮게 취급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하는 특별한 전시회를 마련할 것이다. 그 전시회에서 사람들이 진술을 할 수 있을지,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미지수다.

 

제외하더라도,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강제 입양 피해자가 5만 명이라고 했을 때, 1,000만 달러를 이 5만 명에게 겨우 개인당 200달러씩 나누어 지급하는 셈이 된다.

 

 

Origins는 정부의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헌신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Legal action/class action/compensation? (법적 조치/집단 소송/보상?)

 

비극적이게도 어떤 사람들은 하찮게 취급 받았으며, 몇몇은 잊혀졌고, 어떤 이들은 비참한 상황 속에 있다. 정부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상담이나 감정 표출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번 사과는 상처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으나, 금전적‧법적 피해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많은 이들에게 사과는 너무 늦었으며, 약간의 상담 기회만 있을 뿐이다.

 

총리와 야당 대표는 치유와 책임, 보상, 호주 국민, 명예에 대해 언급했다. “오로지 말만 모아 둔다면 이 모든 피해는 해결하지 못한다”고 Gillard 총리는 말했다. 그는 말에 합당한 행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은 파괴와 손실을 메울 만한 잘 짜여진 개선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어떤 이들에게 재결합되는 것은 더 심한 상처가 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원래 가족들이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재결합이란 명칭은 부적절하다. 즉, 그들은 결코 처음 상태로 결합될 수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에게 보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피해자 개개인의 입장 고려를 요구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조치’는 개개인의 다른 환경에 맞춰져야 한다.

 

이번 사과는 강제 입양 피해자를 범죄 피해자 수준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범위는 범죄 수준의 억압에서부터 불법 구금, 인권 침해, 아동 성범죄까지를 포함한다.

 

강제 입양 피해자의 추후 집단 소송은 후원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번 사과가 정의와 보상을 얻는 데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 여부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번 사과와 책임은 배상이 이루어졌을 때야만 의미가 있다.

 

이번 사과에서는 현재에서 미래까지 잠재적으로 진행 중인 세대 간의 영향은 물론, 이를 다루는 방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The Media(언론)

 

‘국가적 사과’는 국제적으로 뉴스를 만들어냈고, 트위터를 엄청나게 들썩거리게 했다.

 

“우리는 신중함과 대책이 없었던 과거와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적 사과는 “한 국가로서 양심을 찾기 위한 도덕적 성찰에서 나온 심오한 행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들어주기를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길라드 총리가 말했다.

 

그러나 사과가 끝나자마자, 국가적인 통합과 기능,강제 입양 문제에 대한 인정을 약속한 날답지 못하게 대중은 분리와 혼돈, 장애에 부딪혔다.

 

확실히, 호주 노동 정당(Labour leadership)의 주장은 한동안 이슈가 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과가 끝나자마자 사이먼 크린이 그들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 때, 언론의 관심은 미지급된 보상을 포함해 강제 입양의 중요하고 전국적인 이슈에서, 수용과 인정이 아닌 더 많은 소외와 실망을 만들어내는 거짓말, 부정확한 결정, 잘못된 추측으로 옮겨 갔다. (그 보상의 일부는 여전히 입양에 강력히 찬성하는 사람들의 전국적인 이해를 포함함)

 

아무도 언론과 특정 정치인들이 등 돌렸던 희생자들에게는 사과하지 않고, 호주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에만 사과했다. 미디어 왓치 프로그램은 권력에 도전하는 이야기들은 날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안들은 여러 의문을 낳는다. 지속적으로 퇴색(투명하게)되어가는 편견, 잘못된 아집, 호주인들이 진실과 마주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제 기능을 하는가? 어떤 권력자들의 심리적 장애나 사회적 필요는 사과를 억누르기를 바라는가? 호주인의 무의식에 일어난 일은 국가적 사과로 인해 관심이 돌려진 것인가? 언론은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화제 전환에 고의적으로 활용된 것일까?

 

놀랍게도, TV 뉴스는 아무것도 아닌 추측에 집중하고, 실망스러운 이벤트를 위해 일정을 바꾸고 시간을 늘렸다. ABC 뉴스는 7시 20분에 정기 뉴스를 시작하기 전, 7시부터 귀중한 20분을 부족한 이벤트에 할당했다. ‘사과’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일 같았다. 주요 방송 중 단 한 곳에서도 ‘사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느 정도 규모의 ‘권력에 대한 도전 아님’이라는 이야기가 강제 입양 이슈를 언론 상에서 익사시켜 버렸다.

 

위엄을 잃은 채 무시당하고, 언론 보도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떠나서, 우리는 넓은 사회적 이해와 수용을 받을 기회를 잃었다. 여기서 희생자들이 사기를 당했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닌 이야기’가 훨씬 중요해 보이기 때문에, 호주 국민들은 ‘국가적 사과’와 그 이슈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느낌 혹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무지를 계속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언론과 몇몇 정치인들은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다. Gillard와 Abbott는 외면 당했다. 강제 입양에대한 기자 회견은 커녕, 질문조차 없었다. 언론은 그들의 '제4부'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했다. 사과를 뒷받침하는 행동은 어디에 있었는가?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변화는 없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길라드 총리는 “호주 국민들은 역사 존중을 위해 싸우기로 한 당신의 결정에 감탄할 것입니다”라며, “방치의 시간은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러분 중 대부분이 여전히 자아 정체성과의 끊임없는 갈등, 불확실성, 상실감을 경험하며, 긴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국가적 사과’는 위대한 치유로써 환영받는다. 그러나, 호주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여전히 끔찍한 사실과 그들의 불의를 에 마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토크백(녹음실·방송실에서 관계자들끼리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시스템) 라디오는 몇몇 사람들이 (강제입양을) 범죄와 부도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능력함을 보여준다. 토크백 라디오에서 비평가들은 “우리는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Origins와 같은 조직은 극단주의자들이다. 강제 입양은 옳은, 유일한 결정이었고 계속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래된 “약자를 괴롭히는 오만함”은 일부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몇몇의 냉담한 가해자들은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낫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제 입양과 그와 관련된 무수한 범죄들이 옳다고 했던 과거 주류의 관습과 문화에 상관없이, 가해자들은 그것들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도덕성과 인류애의 근본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사람들이 바뀌어야 할 뿐이다.

 

슬프게도 국가적인 사과를 포함한 여러 사과들 후에도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상담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면과 악마화와 편견과 정신병과 조롱으로부터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이는 그들의 삶의 질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자기 결정권을 위협한다. Origins의 한 멤버가 말하기를, “‘사과’ 후에 내 양부모의 교회에 다니는 한 남자는 길에서 만났을 때 나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지나갔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 얼마나 고독한지를 고통스럽게 되새겼다. ‘사과’ 이후로 나에게 연락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나는 쉬기 위해서는 수면제를 먹어야만 한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며, 고용과 사회적 수용과 가족을 바라는 채로 남아있다. 어떤 목소리들은, 가족의 거절과 죄책감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용되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가? 국가적인 강제 입양 전시회의 준비와 관리 등등에 집단적인 관여가 존재하는 것은 어떤 가능성이 있나? 강제 입양 피해자들이 다른 피해자들을 상담해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은 어떤가?

 

교회, 병원, 상원 위원회는 영연방이 강제 입양에 영향 받은 모든 이들에게 사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며, 재정적인 책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논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중은 ‘모든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보다 더 높은 위엄이 타당하다고 했다. 또한 ‘국가적 사과’는 틀림없이 아주 작은 개인적 단계에서도 사과와 긍정적인 행동을 간접적으로 일으킬 것이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단계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변화들이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과거 교회의 입양 관행과 과정에서 (미혼모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범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단체의 장황한 설명은 보기에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전적으로 사과한 것으로 보인다. 8개 중 5개의 주 정부 또한 사과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몇몇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모른다. 마치 이렇게 하여 마법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처럼, 단체들이 단지 주장하고 내버려두게 하면 단체들은 미혼모들과 호주 사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병원, 교회, 자선사업가 등은 보상금을 내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가해자들은 살아남은 피해자들에게 전적으로 사과하고 정직하게 유익한, 진실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행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연결이 단절된 곳이든 연결이 고통스럽고 유해한 곳이든, 양 쪽에 대한 이해를 통해 구축된 긍정적인 연결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강제 입양에 대한 모든 사과가 그저 가식과 자기방어, 은폐, 계속된 해로운 태도와 몇몇 사람에 대해(특히 교회와 몇몇 가족에 속한) 계속될 행동의 대표가 아니라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학대 받거나 학대한 사람들이 개선된 행동을 할 것을 비도덕적으로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과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범법자들을 정의로 데려가는 것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일 할 뿐이다. 우리는 이해, 사과, 변화, 근거 없이 주장된 범죄에 대한 보상, 보상과 사회적 정의를 위한 싸움에의 참여가 그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라고 말한다. 미련하고 단편적인 문화주의자들의 다수가 그들의 잘못된 가치를 비도덕적이고 범죄인 강요를 통해 시행했고, 강제 입양이라는 결과를 낳았던 잔인했던 날들이 끝났다.

 

Origins는 구성에 있어 긍정적인 효과에 의지하며, ‘국가적 사과’를 새로운 시작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의 기록보다도, 우리는 계속해서 강제 입양 피해자들의 삶을 가능한 가장 좋게 고쳐줄 필요가 있다.

 

원문 출처 http://www.originsnsw.com/id80.html

]Wesley Rush (Adoptee) for Origins SPSA Inc

 

 

 

Christine’s Adoption Story – Newmarket, Ontario, 1982

1982, 14살 나는 임신을 했다. 엄마는 내 임신을 처음 눈치챘을 때, 우리가너무 늦기 전에 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의사와 진찰 예약을 잡았다.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한 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진찰을 받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진찰을 받게 되었고, 의사는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나의 임신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임신이었고 그것을해결하기에는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출산 전까지 시골에 계신 이모와 삼촌과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 일단 아기를 낳고 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나의 가족들의 계획은 그랬다.

이모가 아는 의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입양을 보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이를 키우고 싶은 내 열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기적이고, 미성숙하고, 애정이 없고, 잔인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조차도 아이에 불과했고, 나는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나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결정을 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고들 했다. 그 결정은 나의 엄마에게 달린 것이었다. 나는 약자였고, 엄마는 나의 보호자였기에, 엄마는 그 결정을 내릴 책임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엄마에게 그 결정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고 어리석은 실수가 나의 삶, 나의 미래를 망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납득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실은 엄마의 가족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들에게 불명예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할아버지와 나는 엄청나게 가까웠고, 모든 손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예쁨 받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내가 더 이상 손녀가 아니라고 했고, 나와 의절했다. 그 후 18년 동안 모든 가족 모임과 파티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무시했고, 투명인간 취급했다.

우리 엄마, 동생, 이모, 삼촌, 의사와 사회복지사들은 내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하며, 내가 줄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정을 찾아줘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나를 확신시켰고, 나도 스스로 확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로 그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15세가 되던 1982 10 6, 내 딸은 온타리오 뉴마켓의 요크 컨트리 병원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내가 내 아이를 만지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보는 것조차 금지했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를 보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나는 우리가 남은 삶을 함께 보내지 못할 것이라면, 적어도 함께할 수 있는 매 순간만큼은 가치 있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모는 내 편을 들어주었고 내게 아이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 후 4일 동안 나는 아이를 안고 흔들며 얼렀고, 뽀뽀하고 노래를 해주고 젖을 먹였다. 나는 아이에게 평생 동안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귀한 시간을 낭비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아이에게 꼭 붙어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왔지만, 손녀를 만나는 것은 거부했고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엄마가 실제로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마음을 바꿔서 우리 세 명이 함께 병원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딸 없이 병원을 떠나던 그날, 나는 죽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전의 나, 내가 믿어왔던 것, 내가 신뢰한 사람들은 그 즉시 없어져 버렸다. 내가 돌아갈 평범한 삶은 없었고, 나는 사라졌다.

나는 입양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 엄청난 감정적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내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해왔지만, 그들이 생모가 아닌 한 아무도 내가 경험한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입양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처이다. 선의에서 입양을 지지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딸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와 가족들은, 실제로는 딸들을 평생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게 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엄마의 삶에 영원히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 경험으로부터 평생 동안 결코 회복될 수 없다. 그녀는 깊고 가슴저린 공허함과 그녀의 삶에서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갈망과 함께 살아간다.

다른 아이를 가지는 것이 이 감정을 없애지는 못한다; 상처와 고통이 크게 자라도록 할 뿐이다. 그녀가 다른 아이와 함께 경험했던 각각의 중요한 순간들에는, 그녀가 잃어버린 아이와 함께하지 못한 모든 특별한 순간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슬픔이 따를 것이다. 엄마의 마음에는 그녀가 낳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각각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과 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지에 관계없이, 늘 빈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일부분은 항상 그녀의 아이와 떨어지는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그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아이를 안고 만지고 어르는 것을 그리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보낼 날은 그녀의 일평생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 그녀의 아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살펴달라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나는 밤 또한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십대의 임신을 장려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며,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가정과 사회가 십대 엄마들에게 '만약 그들이 아이를 걱정하고 사랑한다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옳은 일을 해야 하고,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하기보다는 '지지와 사랑, 그리고 보살핌'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사회는 십대 엄마들에게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정상가족, 번듯한 차와 명품들이 있는 큰 집임을 납득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십대 엄마들에게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감히 설득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실 아이들이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엄마와 아이 간의 유대는 끊어져서는 안 된다.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학대이자 고문이며, 둘 모두 이로 인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텅 빈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고, 행복한 결말은 있을 수 없다.

엄마와 아이의 재회가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쌓기 위해 많은 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또한 가족들에게 아이를 소개할 때, 편안하고 알맞은 역할을 찾으려 노력하면서 가족 모두 애써야 할 것이다.

내 딸 없이 퇴원하던 날은 내 죽음의 날이었다. 나는 결코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지 못했고, 그 후 21년 동안은 나는 유령처럼 살았다.

만약 당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딸에게 등돌리지 말라고 모든 부모에게 강력히 충고한다. 딸과 당신의 손주를 위해 그 자리에 있어주어라. 그들이함께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15살 소녀에게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이를 키우게 하는 것보다 더 그녀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ontario-1982/

 

시다의 입양 이야기 브리티시컬럼비아 빅토리아, 1980

 

사람들이 우리의 “(아이를) 포기하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1980, 첫째 아이를 낳았을 당시에 나는 17살이었다. 나는 미혼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내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친척들이 알지 못하도록 부모님은 나를 웨이지홈(wage-home)’으로 보냈다. 내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를 빼앗아갈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다.

 

오전 1시에 진통이 시작됐다. 부모님이 나를 페어필드 로드에 있는 빅토리아 종합병원에 데리고 가서 입원 신청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처럼 일반적인 진통과 출산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미혼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원한 다음 나는 이동식 침대에 눕혀져서 작은 창고로 보내졌다. 간호사는 나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진통이 있던 그날 밤의 첫 6시간 동안 그냥 자도록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진통이 심해서 잘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밤중에 딱 한 번 내 상태를 확인하러 왔고,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수면제를 더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나는 24시간 동안 깨어있었다. 여전히 진통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거나 마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레지던트가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데메롤(Demerol-진통제)을 줬지만, 오히려 구역질이 나고 정신이 멍했다.

 

오후 5시쯤 자궁이 완전히 넓어졌을 때, 나는 지난 18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한 채로 30시간 동안 깨어 있는 상태였다.

 

차가운 하얀 빛이 비치는 분만실로 이동되어 분만대에 줄로 묶인 채 눕혀졌다. 발 고정대에 발을 올린 채, 팔은 가죽줄로 탁자에 묶여있었다. 그 때는 이러한 조치가 내가 분만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내 아이를 세균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내 아이는 탯줄을 자르기 무섭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정말 잠깐도 볼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법적으로 여전히 내 아이였지만, 내 허락도 없이 아이를 빼앗아갔다. 입양시스템은 이렇게 내가 아이와의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게 해서 아이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나는 외음 봉합술을 받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외음 절개술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취는 이뤄지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힘이 없어서 걸을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아이를 봐도 되냐고 물어봐도 거절당할까 봐 묻지 못했다. 나 역시 아이를 볼 권리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간호사들은 자라고 말하며 독한 진정제를 투여했다.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 발을 끌며 조금은 걸을 수 있었고, 마침내 간호사에게 내 아들을 봐도 되냐고 물어봤다. 놀랍게도 그 간호사는 괜찮다고 말했다. 내 아이는 내 병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기방에 있었다. 의사가 나를 산부인과 병동이 아닌 부인과 병동에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고, 온몸의 멍과 10cm의 외음봉합 상처로 인해 아팠지만, 내 아이를 보기 위해 병동의 다른 한 쪽 끝까지 혼자 느리게 걸어갔다.

 

내 아이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본 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내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모성애였다. 모든 피, 육체와 정신에서 비롯되는 사랑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 아이가 태어날 때, 역시 엄마로써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본능, 두 몸에 한 영혼이 있는 유대감, 엄마와 아이가 공유하는 욕구, 내 아이와 함께 지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이 출산의 현실이며, 모든 여성이 겪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직접 알게된 사실이다.

 

나는 내 생명보다도 내 아이를 사랑했다. 내 마음 전부와 내 몸의 모든 세포로 아이를 사랑했고, 안아주고 꼭 껴안고 데리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기방에 있을 때, 간호사들은 내가 아이를 안지 못하도록 계속 지켜봤다. 나는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단 침입한 느낌이 들었고,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내 아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아이를 스스로 키우고 싶었지만 사회복지사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회복지사는 내가 입양서류와 출생신고서에 서명하도록 내 병실에 왔다.  내가 입양이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더니 사회복지사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입양하라고 압력을 줬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마음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하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세 달 전에 자기 아들을 입양시킨 경험이 있는 다른  고객한 명을 보냈다. 그 사람은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에 대해 극찬 했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어머니가 되기에 너무 어리고 내 아들은 정상적인 부모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출산으로 인한 호르몬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표했다. 내 부모님도 내 아이를 절대 집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나는 이미 부모님에게 가족의 수치였기 때문이다.

 

내가 울면서 아이가 태어난 지 며칠 후 서류에 서명했고, 주변의 모든 어른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내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고 (내 부모님의 눈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사회복지사 사무실에서 어떤 서류에 서명을 했던 그 사본을 받지 못했다.  그 곳에는 내 권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변호사가 없었다.  19세 미만의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사회 복지 혜택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복지사에게 내 아들이 (내가 그를 법적으로 찾아도 될 수 있는) 19세가 될 때 내가 찾으리라는 것을 입양한 부부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것뿐 이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에게 그 부부가 내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사회복지사는 내 부탁을 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편지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입양 후 여파의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당시 사회복지계가 비탄과 고통, 상실감 등 입양의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당시 아무도 나에게 그 결과들에 대해서 경고하지 않았다.  한 사회복지사가 내 소중한 아이 미샤엘(Michael, 별명은 미샤’)을 양부모가 병원에서 데리고 나갔다는 마지막 전화를 했을 때 나의 일부는 죽었다.

 

 (24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그 때의 눈물을 흘리고 그 순간들을 감정적으로 다시 느낀다. 내 아들과의 상봉은 억제된 기억과 감정을 드러나게 했다. 회상들은 참혹하고 나를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 고통과 기억들이 내가 아직도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느껴진다. 게다가 나는 내 소장이 죄어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신체적 영향 때문에 네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을 잃은 충격에 빠진 상태로 고등학교 3학년을 4개월만에 끝냈지만 약 8개월 후, 충격이 사라지자 내 아들을 잃은 것으로 인한 심한 고통에 대처하려2년 동안 노력했고 대학을 중퇴했다.

 

소울메이트였던 내 남자친구와 나에게 생긴 일로 인한 고통이 우리의 헤어짐의 원인이 됐다. 근친과 사별하는 것보다 100배 더 심한(내 아버지나 형제의 죽음과 같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고통과 상실감에 대해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다. 내 애인은 고통을 줄이려고 마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경우에는 몇 년 동안 아무렇게나 살고 나서 다행히 고통을 감추게 됐지만 내 아들과 상봉했을 때 그 고통이 다시 떠오를 줄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들을 법적으로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남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내 아들이 9살이나 10살 때쯤 되었을 때는 사립 탐정도 고용해 봤지만 아들을 찾지 못 했다.  그 동안 내 가슴에 있는 블랙홀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세 명 더 낳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어떤 아이도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알게 됐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것은 내 이야기다.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친 적이 없다.  그리워하기를 그만둔 적도 없다.  아들을 키우는 방법을 찾지 못한 내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지금 내 아들이 나에 대해 느낄 분노보다 더 심하다. 나는 결국 사회복지사들의 고객들을 위한 아기를 낳기 위해 조종, 이용당한18살의 어머니였다. 미성년자가 어른들에게 강요당해 성관계를 하는 것은 성적인 착취라고 한다. 그들이 이득을 얻기 위해서 미성년자의 생식력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생식적 착취(reproductive exploitation)!

 

젊은 여성들이 친부모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자기 아이를 위해서 입양이 제일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글들을 읽을 때, 그들에게 입양 과정을 거치면서 겪을 일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매일 그리고 매번 느끼는 이 고통을 내 원수에게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친어머니들이 자기를 포기하기로 한 선택에 대한 말을 할 때 내가 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은 없었다는 것이다.

 

상봉에 대해 덧붙이자면, 내 아들이 19세가 됐을 때 내 혼외 출산 죄에 대한 처벌이 끝나, 드디어 난 내 아들을 법적으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내 아들의 인생에서 나의 접근 금지가 끝났고 그를 찾았다. 그리고 내 아들의 눈을 봤을 때 우리 둘의 영혼은 서로를 알아봤고 나는 오래 전, 입양으로 인해 잃었던 내 아이를 알아봤다. 내 안에 있었던 장벽들이 무너지고 20년 동안 숨어 있었던 비탄이 다시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울기 시작했다. 건장하고 키가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내 아들은 내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나를 안아줬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은 우리 가족, 그가 파파로 부르는 친아버지와 상봉했다. 태어났을 때 내가 준 이름을 다시 사용하고 있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우리 둘이 법적으로 가족이 될 수 있게 미래에 내가 그를 입양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 아들이 나를 안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내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더 치유된다.

 

입양 관행은 일단 아기 엄마를 무너뜨려야만 아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다이앤 웰패이르 (Dian Wellfare), 오리진스사 (Origins, Inc.) 창립자는 말했다.

 

이는 2001 10 16일 내 아들과 상봉한 다음, 아들의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메일에서 잘 알 수 있다. “램지[Ramsay, 양부모가 내 아들에게 준 이름]는 어머니 한 명과 아버지 한 명이 있다램지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고 어떤 방식으로도 그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했다.

 

입양은 원해지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원해지지 않은 어머니들에 대한 문제다.

 

 원치않는 아이들을 버리고, 그들에게 영원히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무관심한 친어머니의 그림들을 만든 곳은 바로 아동복지기관이다. 아동복지기관은 이런 어머니들이 거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반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을 편리하게 한다. 사회정책개발자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은 친부모가족의 중요성을 쉽게 묵살하지 않기 때문에, 아동복지기관은 아이를 포기한 부모들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부모들과 다르게 묘사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입양을 보낸 친어머니는 다르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친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만큼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면 입양의 장점은 입양의 비극에 눌릴 것이기 때문이다. 입양부모들이 친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들의 죄책감은 어느 정도 줄어드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차지할 권리가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회도,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의 극심한 고통을 직시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 마가레트 맥도널드 로렌스 (Margaret McDonald Lawrence), 미국 입양 회의 첫 전국 대회에 한 연설, 워싱턴 D.C., 1979 5 4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victoria-bc-1980/


 

강제입양에 대한 국가의 사과

2013 3 21

 

1.    오늘, 호주의 국민들을 대신하여, 국회는 어머니에게서 아이를 분리하도록 강요했던 정책과 관행들이 그들에게 평생 고통을 남겼다는 것에 책임을 느끼고 사죄를 표명합니다.

 

2.    우리는 이 정책과 관행들이 아버지들에게도 심오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합니다.

 

3.    그리고 우리는 이 결과가 형제, 자매, 조부모, 부모와 친인척들에게도 상처를 주었음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어머니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인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을 부정한 수치스러운 정책을 개탄합니다. 여러분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머니로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받았어야 할 지원도 박탈당했습니다.

 

5.    어머니들에게 어떠한 선택권도 주지 않았고, 취약한 위치에서 조종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여러분들에게 학대와 위법을 일삼았던 제도에 대해 우리는 사죄합니다.

 

6.    우리는 권리를 부정당했던 어머니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채 입양에 동의하게 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입양이 옳다라는 확신을 하게 했고 여러분들은 강요와 비윤리적이고 정직하지 못하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불법적이었던 잔인한 관행을 견뎌내어야 했습니다.

 

7.    우리는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로 인해 이러한 관행으로부터 피해와 고통을 받아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상실과 슬픔, 권리박탈, 비난, 죄책감에 대해 우리는 사죄합니다.

 

8.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거부했다고 믿고 있거나 가족과 자신의 본래 지역사회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정당한, 입양 보내진 각각의 개인들에게 우리는 사죄합니다.

 

9.    우리는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알지 못한 채 성장한 아들과 딸들에게 사죄합니다.

 

10. 우리는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끊임없는 정체성갈등, 불확실함과 상실 그리고 현재 가족에 대한 충성과 다른 원가족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지속적인 긴장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1. 우리는 아이들의 삶에서 배제 당한 아버지들, 아이출산 기록에 인지되지 못한 여러분의 상실과 슬픔을 인정합니다.

 

12. 우리는 강제입양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있어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이 고통을 공유하는 당신이 사랑하는 형제 자매, 조부모와 부모들, 혹은 그들의 삶을 공유할 수 없는 여러분께 우리는 사죄합니다.

 

13.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몇몇 가족들은 헤어져서 서로 영원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원가족과의 재회와 그들과 관계를 쌓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러분에게 우리는 사죄합니다.

 

14. 우리는 이 사과가 여러분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희망하며 국가의 어두운 역사의 빛을 밝히기를 희망합니다.

 

15. 진실을 위해 싸웠던 여러분들,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분들이 너무 오래 침묵으로 견뎠음을 알고 있습니다.

 

16. 우리는 지금 많은 분들이 이 곳에서 현재 상황을 공유할 수 없음이 슬픕니다. 특히, 우리는 입양관행으로 자신의 삶을 빼앗긴 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깊은 애도가 그들의 가족에게 전달되길 바랍니다.

 

17. 과거의 수치스러운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피해 입은 분들의 필요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특별 상담서비스와 지원, 진실을 찾기 위한 기록의 자유열람, 잃어버린 가족과 재회할 수 있는 도움 등이 포함됩니다.

 

18.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이러한 관행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미래의 상황에 직면하면서, 우리는 가족이별의 교훈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보호와 그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양육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권리임에 중점을 둘 것입니다.

 

19. 깊은 애도와 회한과 함께,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적으로 사과하는 바입니다.

 

원문: http://www.ag.gov.au/About/ForcedAdoptionsApology/Pages/default.aspx

 

 

2012 429 호주상원위원회에서는 과거 강제입양의 정책과 관행에 대한 연구 발표했습니다. 연구에는 20개의 권고사항과, 강제입양 관행으로 피해 받은 경험에 대해 인지하고 인정한 국가의 사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구에서는 20세기 중반 호주에서 팽배했던 강제입양과, 아이를 빼앗아가는 정책 관행이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상원위원들은 강제입양으로 피해를 입은 수천 명의 개인들의 진술로부터 이들이 강제입양으로 인해 고통 받았으며, 입양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났음을 있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엄마들은 억지로 마약에 취하게 되거나 물리적으로는 침대에 족쇄로 묶이게 되었고,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를 키울 있게 도울 수도 있었던 정부보조금에 대해서 사회복지사가 조언하지 않았던 , 여러 가지 엄마들이 겪은 경험이 발견되었습니다.

강제입양관행은 매우 많은 수의 호주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어머니들, 아버지들과 입양인들에게 현재도 진행중인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연구에서는 1951년과 1975 사이에 140,000~150,000건의 입양이 일어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잠재적으로 1940 이후 현재까지 250,000 이상의 입양이 있었음을 추산합니다. 그러나, 연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요된 입양으로 피해 입었는지 정확한 사람의 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2012 6 23 법무장관인   니콜라 록슨(Hon Nicola Roxon) 하원의원은 정부가 강제입양 관행으로 피해 받은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사과가 그들이 경험했던 것을 없었던 일로 없지만 사과는 입양관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어머니들, 아버지들, 입양인 그리고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정의 희망이 것입니다. 또한 사과는 강제 입양관행으로 피해 받았던 사람들의 경험을 많은 대중들에게 교육할 있는 좋은 기회가 것입니다.

원문: http://www.ag.gov.au/About/ForcedAdoptionsApology/Pages/Backgroundtothenationalapology.aspx

 

리사의 입양 이야기: 오타와, 온타리오, 1990

 

 

 

나는 1990년에 딸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했다.

 

 

 

내가 임신했을 때, 사람들은 내게 계속적으로 강요하고, 거짓말하고, 조종하고, 스토킹하고, 괴롭히고, 큰 소리로 소리치곤 했으며, 나의 권리 (혹은 나의 딸의 권리)를 대변할 변호사도 없이 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나는 문서를 읽는 것도,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문서의 내용을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는 현재 내 서명이 위조됐는지 확인하는 중이지만, 이미 피해를 입었다.  나는 그 문서들의 어떤 사본도 받지 못했다. (18년이 지나 문서에 쓰여 있는 신원 미확인 정보를 받았을 때, 나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회파괴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사회복지사는 내 아름다운 딸에게친어머니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만족했다고 말했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고 비탄에 빠져 있었을 뿐, 만족했던 적은 없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내장 수축, 해결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의 지옥 속에 살았던 것도 만족으로 간주되는가?

 

 

 

나는 그때 16살이었고, (입양 서비스를 제공하던) 아기 중개인들이 내 서명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나를 엄마와 떨어뜨려놓았다. 그렇다. 나는 극도의 협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그들의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 딸을 스스로 키우고 싶다고 거듭 말했고 분명히 알려줬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내 딸을 데리고 있으려는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내가 그리 이기적이었는가?! 내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집에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내 딸을 계속 키울 수 있게 해줬을 금융 정보는 고의적으로 제공되지 않았다. 아이의 아빠 역시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사회복지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조산 시설로 보낸다고 협박했다. 내가 혼외 정사 죄를 범했기 때문에 조산 감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역겹다. 요즘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입양이 허용되지 않는가?  아이는 반드시 부부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로 갔나? 위선자들.

 

그들은 내가 딸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했다. 또한 내 딸에게너의 친어머니는 본인보다 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네가 길러지길 원했다고 말했다. 나보다 내 딸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 어느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바로 내 딸의 어머니다. 그 사회복지사는 내가 딸과 다시 만날 가능성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는 내 딸의 존재를 잊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아이는 내 아이니까!

 

 

 

 

 

 그들은 내가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내 아이는 무한정 가정위탁보호서비스 하에 놓여있게 되며, 만약 내가 가정위탁보호서비스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내가 서명을 하든 하지 않든 그들은 내 아이를 빼앗아갈 것이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내 딸을 스스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내 딸의 입양으로 벌 수 있었던 돈을 원한 것이다. (우리 학교에는 나 이외에도 임신한 여자가 두 명 더 있었다. 사회파괴자들에게 왜 다른 엄마들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지 물어봤더니, 그들은얘야, 너는 백인이잖니라고 말했다.) 내 딸을 잃은 후, 다른 두 명의 엄마들은 사회적 지원을 받아서 행복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은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들의 아이들은 고통 받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과 비탄 속에서 평생을 살고, 매일 피를 흘리는 듯 느끼면서 하루 하루를 견디려고 노력해오던 중에, 나는 내 딸이 속아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딸에게 진실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딸을 입양한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를 당하고 있다.) 내 딸이 상처를 입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를 정말 사랑하고 보고 싶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렇다. 사회복지사들은 나에게 꺼지라고, 닥치라고도 했다. 임신했던 기억 자체를 잊으라고 했다. 그들 중 몇 명은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동의하도록 강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임신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서, 왜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느냐고 했다. 뱃속에 있는 내 딸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내가 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들은 그런 말을 싫어했다. 내가 아이를 낳는 것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나? 내 모성이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나?

 

 

 우리는 입양을 이렇게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괴, 납치, 그리고 끔찍한 것. 입양은 거짓말을 만들기 위해서 어머니들을 망쳐버린다.

 

 

 

 

 

 

 

1963, 카렌 (Karen Lynn) 어머니가 그녀를 온타리오 클락슨(Clarkson, Ontario) 미혼모 시설로 보냈을 , 카렌은 19살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성을 사용하는 대신 카렌A라고 불렸으며, 입양에 동의해야만 시설에 머무를 있었다.

일년 , 빅토리아(Victoria) 있는 병원에서 당시 스무 살이었던 샤론 피더슨(Sharon Pedersen) 출산 마취되어 침대에 묶여졌고, 이후 창문을 통해 신생아실의 자신이 낳지 않은 명의 아기를 았던 것이 전부였다고 말한다.

 

그녀가 입양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려 소리를 지르고 가구를 던지자, 사회복지사들은 손에 강제로 펜을 쥐게 했고 경찰을 부른다고 협박했다. 결국 그녀는 지역 아동지원단체의 입양동의서에 서명했다.

 

캐나다 전역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밝혀지면서, 이때까지 캐나다의 입양 관행에 대한 연방 정부의 조사를 요청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난 ,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와 다시 만날 있었지만, 그들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졌던 강제적 입양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든 미혼모가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되거나 강제적으로 입양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에 드러난 미혼모들의 사례가 전부인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루어진 입양에 관한 최근 호주정부의 조사에 제출된 증언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지난 호주 상원 위원회는 정부가아이를 강제적으로 빼앗긴 많은 부모들에게 사과를 하도록 촉구했다.

 

분야 관련 전담 변호사에 의하면, 캐나다에선 조사에 대한 단순한 요구를 넘어 퀘벡(Quebec) 비롯한 서부지역 ()정부를 납치, 사기와 강압으로 고소하는 집단소송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대변인인 부르스 그레거슨(Bruce Gregersen) 이야기는 슬프고 힘든 분명하며, 우리는 이제야 이야기들을 듣기 시작했다 말했다. 연합 교회가 다른 단체와 함께 운영한 위니펙(Winnipeg) 있던여성을 위한 교회 ’(Winnipeg’s Church Home for Girls)에서는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고자 한다면 형사 입건될 있다고 통보받았다. 그레거슨은이것이 우리가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라고 덧붙였다.

 

<내셔널 포스트(National Post)> 일곱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그녀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것이 처음이었으며, 미혼모가 아이를 입양시키도록 했던 단순한 사회적인 압박 이상의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십대의 미혼모였던 밸러리 앤드루즈(Valerie Andrews) 그녀 자신도 모르게 모유 수유를 멈추는 약을 먹었다고 했다. 한나 앤더슨(Hanne Andersen) 역시 십대의 미혼모로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려고 했지만, 이미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 병원 기록에는입양을 위한 아기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말했다. 온타리오 서드베리(Sudbury) 사회복지사들은 에스더 타디프(Esther Tardif)에게 그녀가 공공부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사랑한다면 입양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에서 인터뷰한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강압이 체계적이었다고 말했다. 교회가 운영하는 조산시설에서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서는 입양이 필수 조건이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헤어짐의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야만 했다. 사회복지사들은 공공부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미혼모들이 아이를 위태롭게 있기 때문에 기소될 있다고 말했다. 의료진들 역시 미혼모들을걸레라고 부르며 진통제를 주지 않았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십대들을 침대에 묶고 천으로 그들의 시야를 가려 출산과정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입양 관행 하의 어머니들에 대한 나쁜 대우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캐나다의 생모 협회(Canadian Council of Natural Mothers) 회장인 (Lynn)캐나다의 기득권층에게 이번 이슈는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상너는 아기를 포기했어라는 말을 들어왔고, 때마다 내가 말한 것은 기껏해야 그것이 비극적인 선택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앤드루즈는 캐나다 통계청의 1945년부터 1973년까지의 사생아에 대한 정보와 당시 대략적인 미혼모들의 입양 선택 비율을 연구했고, 결과 천문학적인 추정치를 내놓았다. 무려 35 명의 캐나다 미혼모들이 입양을 선택하도록 설득이나 강요, 강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리 체임버스(Lori Chambers) 어떤 미혼 여성들이 아이가 안정한 가정에서 자라고 사생아의 오명을 피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69년까지 온타리오의 미혼모들에 대한 <오해(Misconceptions)>라는 책을 쓰기 위해, 보관되어있던 수천 가지 아동지원사례를 조사한 있다. 배척 당한 여성들 모두가 조산시설에서 고통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는 제공받을 없는 주거지와 음식, 우정에 감사하는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체임버스는 “‘미혼 여성들이 아이들을 포기했는가 아니라, ‘어떻게 어떤 여성들은 포기하지 않을 힘을 가졌나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대부분의 미혼모는 아이를 포기하고 아이를 입양을 보낸다 말했다.

 

앤드루즈는 낙태가 불법이고 피임이 쉽지 않았으며 미혼모를 문란하고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지능이 너무 낮다고 보았던 시기에, 교회가 운영한 조산시설과 병원, 아동지원단체들에서 십대 미혼모들이 받은 대우를 지난 4 동안 기록해왔다.

 

1960년대에 토론토(Toronto)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미혼모 문제를 다루던 사회복지사 조이스 마셀링크(Joyce Masselink) 앤드루즈의 추정치가현실적이지 않은 같다, 그녀가 자주 방문하던 밴쿠버(Vancouver) 교회가 운영하던 조산시설에 있던 소녀들은아주 좋은 대우를 받았다 말했다.

 

온타리오 하원 의원 마릴린 철리(Marilyn Churley) 1968 임신했을 당시 도와줄 사람이 없을 , 온타리오의 사회 복지사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는 입양 이외의 대안에 대해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았고, 철리는 진통제 없이끔찍한” 24시간의 진통을 참아야만 했다.

 

마셀링크는내가 알고 있는 사회복지사 입양을 강요한 사람은 없었고 나도 절대 그러지 않았다 했지만 몇몇은 당시의 사회적 가치관을 철저하게 따르도록 유도했다고 덧붙였다. “그런 관행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말했다.

 

1961425일자 신문의 인생 상담란에 랜더스(Ann Landers) 칼럼은 당대의 미혼모에 대한 시선을 가장 보여준다. 미혼모의 자식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녀는그런사랑 의심스럽다. 그것은 병적이고 뒤바뀐 사랑이며, 자기 연민과 자멸, 순교의 불건전한 조합이다라고 썼다.

 

앤드루즈는 인터뷰를 대부분의 어머니들이수치심을 느낄까봐그들의 비밀을 수십 동안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난 호주의 보도자료가 나온 이후로, 캐나다인 어머니들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원치 않았던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릴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앤드루즈는 토론토에서 이번 가을에 캐나다의 입양 역사를 밝힐 이틀 간의 회의를 준비했고 수백 명의 어머니들과 입양된 사람들이 참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주 위원회는 정부가 그때의 사회적 가치관을 언급하지 않고, 어머니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하도록 요구했다. 보도에 따르면 어떤 어머니들은체계적인 무력화로 임신 기간 동안 피해를 받았다 말했다.

 

온타리오에 사는 케이티(Katie) 자신의 딸이 자신이 강간으로 임신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성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나는 아직도 수치심을 느낀다. 병원 기록을 통해 사람들이 나한테 짓을 후에야 끔찍한 부담에서 벗어나 편히 숨을 있었다 말했다.

 

케이티는 그녀가 살던 연합 교회 시설에서 멀지 않은 위니펙 병원에서 분만유도약을 받았고, 자신의 아이를 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발의 17 소녀는화학적 구속복(like a chemical straight-jacket-정신 이상자와 같이 폭력적인 사람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해 입히는 )" 인해 정신을 잃었고, 나중에 깨어났을 갓난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검은 머리의 아이를 보았다고 했다.

 

케이티는 입양동의서에 절대로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가 법정에서 끄덕인 것이 딸을 국가의 보호를 받는 피보호자로 만든 같다고 기억한다.

 

체임버스는 온타리오의 아동지원단체들이1965 정부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기 이전에는 대부분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었고, 아이를 입양한 부모로부터도 빈번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단체들은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이 있었고, 가끔은 아이의 친아버지와도 거래를 했다. 거래 조건은 그가 입양에 동의하고 단체에 소액을 지불하면, 단체가 비용이 많이 드는 법적 양육비 분쟁에서 여자를 변호하지 않는 것이었다.

 

입양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지원하는 오리진스 캐나다(Origins Canada) 대표인 앤드루즈는 캐나다 연방 정부가 호주의 선례를 따르고 자국에서의 조사에 착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녀는 100명의 어머니와 입양된 사람들이 기관에서 실시하는 추후의 조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리진스 캐나다에 등록했지만 법무부 장관인 니콜슨(Rob Nicolson) 측에서 앤드루즈에게 이것은 주가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고 말했다. 장관의 대변인은 그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앤드루즈에 따르면 2011 7월에 그녀의 온타리오 주의회의원인 레자 모리디(Reza Moridi) 아동청소년 복지부 장관에게 편지에는 아직까지 답장이 없다.

 

앤더슨은아무도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호주 여성들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앤더슨은 태어났을 불법적으로 헤어진사람들을 위한 변호 그룹인 어머니와 아이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other and Child) 현재 이끌고 있다.

 

앤더슨은 수요가 높은 건강한 백인 아기를 낳은 어머니들이타겟이 것에 대한 캐나다기마경찰(RCMP) 범죄 조사를 촉발시키기 위해서 이번 달에 경찰에 신고서를 접수할 계획이다. 1982 15살의 나이로 임신한 앤더슨은 자기 아이를 안아 보는 것이 번밖에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앞으로 주나 개월 안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정부를 상대로 제기할 집단소송에서 대표 원고의 역할을 것이다.

 

앤더슨은 자신이 실제로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입양에 동의했다는 것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출산 직후 발은 아직 고정대에 있었고 아기를 없도록 몸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그들이 아이를 담요에 쌌다나는그만하세요! 우리 아기를 데리고 어디 가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다가 결국에당장 아기를 데리고 와요!’ 라고 소리쳐야 했다 말한다.

 

집단소송 진술서의 초안은 이번 집단소송이 “BFA(Baby for Adoption – 입양을 위한 아기) 의정서 인해 영향을 받은 여성들을 포함할 것이고 부모로써 아이를 키울 기회 박탈 동의가 없는 의학적 치료, 정신적 고통에 대한 일반·특별손해를 다룰 것이라고 명시한다.

 

앤더슨의 유명한 변호사인 토니 머챈트(Tony Merchant)아이가 혼외로 태어났을 경우,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지낼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