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s Adoption Story – Calgary, Alberta, 1960


잉그리드의 입양 이야기-캘거리 알버타(Calgary, Alberta), 1960

 우리는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다.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그들은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나에게서 바로 빼앗아갔다.

나는 14년 전 내 딸과 재회를 했고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세 아이의 할머니가 되었다. 내 딸은 크랜부르크(Cranbrook)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까지 4번 방문을 했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쓰고 전화통화를 한다. 우리는 훌륭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내 딸을 찾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뒤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50년대 말, 60년 대 초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몇은 대부분의 어린 미혼모들이 아기에 관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어린 미혼모들이 해야 하는 그 선택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선택권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 아기를 기르는 것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으로 없었으며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에 대해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의 의도는 부정적으로 혹은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아이를 포기했었어야만 했는지, 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몇몇의 입양아들은 어머니들이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느낀다. 나는 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분노는 여성들이 임신을 했을 때 거의 어떤 선택도 주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적 태도가 만연했던 시대로 향해야 한다. 많은 생모들 대부분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의 분노, 수치, 죄책감의 근본을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위한 길이다.

클라리사 핀콜라 에스트(Clarissa Pinkola Este)늑대들과 달리는 여자(Women Who Run With the Wolves)”라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여자들의 인생을 억압하는 것 들 중에서 가장 이야기 되지 않았던 것은 북미를 포함한 전세계에 있는 미혼모에 관한 것이다. 이 미혼모들은 이 한 세기 동안에만 문화적 관습에 의해 그들의 상태 혹은 그들의 아이들을 숨기도록, 심지어는 그들의 자식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난 받고 영향력을 박탈당한 시민으로서의 반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몇 세대 동안 여자들은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합법적인 인간이 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남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해왔다.”

이 인용문은 중세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이것은 20~30년 전 시대에 팽배했던 일반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여자를 소유했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아이를 소유했다. 만약 여자가 남자 이름의 허가 없이 임신을 했다면 그녀는 사회로부터 비난 받았고 아이는 합법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만 사회의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이도 같이 받은 것이다. 여자와 아이는 사회의 버림받은 자, 즉 고상하지 못한 피해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다. 더 심한 단어로 하면 창녀와 사생아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십대였을 때 나는 이 사고방식에 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관습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그런 방식이었다. 만약 여자가 규율을 어겼다면 그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복도에서 6개월 혹은 1년 간 비밀리 사라진 여자아이들에 관한 수군거림을 기억한다. “그 애는 임신했어.” “애를 낳으러 떠난 거야.” “그 여자아이는 형편없어.” “마을에 어느 누구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 부끄럽지만 나도 같이 험담을 했었다. 나는 그런 나쁜여자아이들에 비해 내 자신을 우월하다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여자아이들이 겪었을 고난, 고통,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아기의 운명에 관해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 여자아이나 아기를 향한 어떤 연민이나 동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쁜 여자아이들이었고 그들은 비난받을 만 했다. 나는 우월함을 느꼈고 착한 여자아이였다.

50, 60년대 고등학교 생활에서 (적어도 나의 작은 마을에서는) 나쁜 여자아이들은 갈 데까지 간 것으로 인식되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착한 여자아이들은 들키지 않았다. 그 때는 콘돔을 제외한 피임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넘어온 것을 자랑했고 그들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가 더 많은 훈장를 얻을수록 더욱 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나쁜 평판을 받았다. 이중적인 기준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여자아이를 술에 취하게 하거나 그녀가 넘어오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감정 협박을 함으로써, 그들의 데이트 상대 혹은 여자친구에게 가차없이 섹스를 강요했던 남자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데이트 강간도 있었다. 데이트 강간은 정확히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흔한 것이었다. 그와 홀로 있었던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남자친구와 키스한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등등. 남자아이들은 비난 받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책임이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품위 있고 도덕적인 젊은 남자들을 옹호하자면, 여자아이가 임신을 했을 때 책임감을 느끼고 옳은일을 했던 몇몇 남자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그들은 그 여자아이와 결혼하였다. 이런 결혼을 샷 건(shot-gun, 속도위반)” 결혼이라고 불렀다. 몇몇의 남자아이들은 옳은 일을 하고 여자아이와 결혼하도록 그들의 부모나 여자아이의 부모에게 강요 받았다. 이것은 결혼의 좋은 기반은 아니었다.

, 사회는 남자아이들의 본능은 허락했지만 여자아이들은 결혼 할 때가지 처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저 섹스를 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심지어 섹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섹스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식에서 맹세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하루 밤 만에 성()의 요정으로 변신해야 했다. 따라서, 우리 중 몇몇은 감정 협박에 굴복했고, 몇몇은 강간으로 고통 받았고, 몇몇은 술에 취해 이용당했고, 그리고 몇몇은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사랑스러운 품을 저항할 수 없었다. 흔한 수단은 네가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했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은 사람은 우리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6살 때 임신을 하였다. 공포 중의 공포, 나는 그들중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알다시피, 매춘부, 부랑자, 창녀, 쉬운 여자가 된 것이다.

나는 수치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내 자신, 부모님에게 수치가 되었으며 평판 또한 떨어졌다. 또한 가문의 이름에 수치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이 나와 의절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복 동생이 있다는 생각에 신나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는 부정한 여자기 때문에 그 아이와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비서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11학년이었는데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고 그 곳에서 속기사와 접대원의 일을 얻었다. 나는 나이를 속였고 혼자 살았다. 일하고 돈을 모으면서 고향 사람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까봐 늘 두려웠고 너무 수치스러웠다.

 나는 캘거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한 충분한 돈을 모았고 사회 복지 센터에 연락을 하였다. 나는 숙식의 대가로 몇몇 가정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크레체 주(The Providence Creche)라는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가톨릭 시설에 배정되었다. 이곳에서 우리의 수치심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외출할 때마다 낄 결혼 반지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익명을 사용해야 했다. 나는 케이티 프루든(Kathy Pruden)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내 생각에는 프루든이라는 이름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이름이 나의 더러움을 없애고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줄 것처럼 말이다. 미혼모 시설의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도시 밖 출신이었고 아무로 서로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숨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을 숨기도록 지시 받았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슬픔과 혼란을 느꼈다. 우리는 수녀들에게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 아무도 우리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도 겪을 상실감, 슬픔,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진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었다.

나는 한밤중에 진통을 느꼈고 수녀 한 명을 깨워야 했다. 그녀는 홀리 크로스(Holy Cross)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고 나 혼자 두고 떠났다. 출산하는 동안 사무적이고 냉담한 직원들이 나를 돌보았고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빼앗아갔다. 내 곁에서 정신적인 지지나 친절을 보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간호사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아기를 데려다주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에게는 미소와 부드러운 속삭임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침대를 지날 때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내 아기를 볼 수 있냐고 질문했고 그들은 내가 딸을 포기했으니 아기를 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차갑게 대답하였다. (나는) 복도를 서성이며 내 딸을 알아볼 수 있을까 바라며 육아실을 훔쳐보았으나 눈에 띄자마자 쫓겨나곤 했다.

내가 병원을 떠나기 바로 전 아기를 볼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그들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15분동안만 허락 해주었다. 마침내 내 딸을 안아볼 수 있었고, 간호사가 갑자기 들어와 아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나는 내 딸의 작고 예쁜 얼굴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를 찾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입양으로 내 딸을 포기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변했으며 그 일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슬픔은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는 다양한 자해행동으로 나타났다.

수치심은 나의 자존감에 영향을 주었다. 수치심은 내가 모든 것을 부인하게 했으며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평판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내 가문의 이름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이 깊고 어두운 비밀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나는 상실감과 슬픔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비극적인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던 그 시대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시대와 사고방식이 변화해왔다. 사회는 더 인도적으로 변화했다. 미혼모들은 나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선택하기 힘들지라도 미혼모들에게 선택권이 있다. 여자들은 슬픔의 과정을 겪을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인정받고 허락되었다. 미혼모들은 제도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오늘날의 많은 어머니들이 몇몇의 우리가 겪었던 것을 겪지 않는 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그러나 이런 이슈에 대한 일반 대중들과 특히 입양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이 그것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견해에 따라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규율에 기초하여 그 시대의 사회 사고방식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우리는 규율을 어긴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치유를 위한 한 방법이다.

 

추신:

30년이 지나고 요청을 하자, 알버타 주정부 공공복지부의 어린이 복지 지부로부터 포기 신청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딸이 태어난 뒤 겨우 5일이 지난 후 병원을 떠나면서 신청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calgary-alberta-1960/

강제입양 국가 사과에 대한 Origins(호주)의 비평

 

“우리는 이 여성들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호주 수상 줄리아 길리아드, 2013년 3월 21일)

 

줄리아 길리아드 총리와 토니 아보트 야당 총수는, 2013년 3월 21일 캔버라 국회 의사당에서 강제 입양과 낙태 피해자들에게 호주 정부를 대표해 사과를 표명했다.

 

강제 입양의 희생자들은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고 그들을 학대한 이들을 언급하는 데에 굉장한 용기와 도덕성을 보여줬다. 오리진스(생모를 위한 호주의 NGO 단체)는 직접, 또는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여 준 모든 이들과 열과 성을 다해 온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리진스는 그동안 고통받으며 이와 같은 인정과 사과를 받기까지 기다려 온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이는 매우 자랑스러운 성과이다.

 

길리아드 총리는 “오늘 호주 의회는, 호주 국민을 대신하여, 오랜 시간 고통과 괴로움의 유산이었던 아기와 엄마를 강제로 분리시킨 정책과 관례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사과하는바”라며, “깊은 슬픔과 후회의 마음으로, 우리는 여러분에게 전적인 사과를 표하는 동시에 신념과 우애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고통 받아 왔음을 알고 있다. 강제 입양은 고통의 이야기이자 참을 수 없는 손실이다. 우리는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진스는 길리아드 총리와 토니 아보트가 책임을 지고자 하는 용기와 리더십, 인간애, 위엄을 받아들이며 감사했다. 이것은 정당 정치를 넘어선 인권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정부, 호주 사회의 몇몇 분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총리의 연설에 보상이나 연금 등은 포함 돼 있지 않지만, 정부가 위법을 인정한 것이다. 오리진스는 이번 국가적 차원의 사과가 강제 입양된 사람들과 생모들을 위한 정의 구현에 있어 상당한 권한과 영향력이 부여될 것으로 기대한다.

 

The Apology

 

이번 총리의 국가적 사과는 어머니와 아버지, 아이들, 다른 가족 구성원들, 권리를 빼앗긴 채 죽어간 희생자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매우 광범위한 시인이자 인정이다.

 

총리는 “이 순간을 함께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여기 없다는 점이 슬프다”며, “특히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길리아드 총리는 어머니들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머니로서 대우받지 못했으며,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대우에 고통 받은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낙인과 죄책감, 약물, 사기 등으로 힘들어 했다. 또, 압박과 위조 동의, 사기, 비도덕적인 강압, 배척, 파괴적인 판결, 용서받을 수 없음,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에서도 어려움에 시달렸다.

 

“교회와 자선단체, 가족, 의료진, 정부 관료들은 가장 원시적이고도 신성한 관계인 엄마와 아이의 유대를 깨뜨렸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집에서 자랐다.” 총리는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한 사회의 공공연한 폭력의 오만”을 인정하며 “이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고 말했다.

 

총리는 강요로 헤어진 가족들이 혈통의 커뮤니티와 문화, 원가족의 정보와 관계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기만당하고 부정되었음을 언급하였다. 그녀는 자아 정체성과 자존감, 유기, 손실, 감정적 충격, 두려움, 불확실함, 불안, 자기 태만, 분리, 억눌림, 입양 부모 또는 기관, 동료로부터의 학대에 맞선 그들의 투쟁을 인정했다.

 

그들은 “결코 엄마의 따뜻함을 느끼거나 엄마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 상처는 성인기에도 남아 있다.” 총리는 가족 간의 재결합을 위한 시도에 대해 언급했다. “강제 입양된 아이들에게 우리는 여러분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을 만하다.”

 

국가적 사과는 아버지들 또한 외면당하고 인정받지 못했으며, 압박감, 상실감 등으로 고통 받아 왔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출생증명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수치심과 용서의 장막 또한 그들의 삶을 뒤덮었다.

 

총리는 강제 입양에 영향을 받은 형제와 자매, 조부모와 다른 친척들 또한 잊지 않았다.

 

강제 입양과 강제 이주는 호주 토착민을 포함한 모든 문화의 호주 출생자와 이민자들에게 일어났음을 언급하였다.

 

 

야당 대표인 토니 아보트 역시 엄마와 아이의 기본권이 잔인하게 부정된 점, 가족과 자선단체가 생모와 아이에 대해 억측한 점 또한 인정했다. 그는 잘못되고 해로운 정부 상황이었다는 점과 함께, 미혼 여성들에게 합법적으로 빚진 사회 보장 혜택을 추가로 인정했다.

 

아보트는 “그들은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의 지원을 받았어야 했다. 우리는 고통을 가했다”며, “그것은 결코 선의만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강제 입양을 주장해온 사람들은 더 잘 알았어야만 했다. 우리가 그때 알았어야만 했다”고 했다. 사랑과 지원, 축하, 정의 대신에 비난과 거절, 침묵, 부정행위가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 슬픔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수년간에 걸쳐 이 부당함이 그들을 짓밟지 못하도록 하면서 우리의 실패를 폭로하려는 단호한 투지를 보여준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늘 우리의 용기는 승리했다.”

 

아보트는 아이들을 잘 키우려 노력해 온 양부모들도 있음을 인정했지만 잘못을 저지른 양부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총리는 “우리는 유감을 표함으로써 역사적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상원위원회의 의견이 호주 정부가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용기를 인정했다.

 

캔버라에 모인 800명의 사람 중 일부는 눈물을 흘렸고, 일부는 총리에게 고마워했다. 어떤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관행’에 대한 사과 발표가 끝났을 때 서서 환호를 보냈다.

 

호주 상원은 약 22만5천명의 아이가 강제 입양을 당했음을 밝혀내었다.

 

사과를 공식화하는 움직임은 하원과 상원 모두에서 일어났다. 호주 국민을 대표해 의회는 책임을 지는 것과 함께 강제 입양과 강제 이주 정책 및 관례에 대한 사과 입장을 표명했다.

 

The promises (서약)

 

Gillard 총리는 아이가 부모를 알 권리와 부모에게 양육되어져야 할 권리를 인정하며, 호주에서 다시는 강제 입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호주 정부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한 자원을 제공할 것을 맹세하며, 전문가 상담 서비스와 지원, 기록 추적을 원활히 하기 위한 5백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 강제 입양 피해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데에 5백만 달러가 추가로 사용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서비스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Origins는 이러한 지원금이 실제 더 나은 서비스를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들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유롭게 기록을 열람함으로써 진실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가족들과의 재결합을 돕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는 의료 기록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은 포함시키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국립 보존 기록관이 강제 입양된 피해자들의 경험을 기록하는 데 150만 달러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강제 입양의 역사가 “다시는 잊혀지거나 하찮게 취급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하는 특별한 전시회를 마련할 것이다. 그 전시회에서 사람들이 진술을 할 수 있을지,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미지수다.

 

제외하더라도,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강제 입양 피해자가 5만 명이라고 했을 때, 1,000만 달러를 이 5만 명에게 겨우 개인당 200달러씩 나누어 지급하는 셈이 된다.

 

 

Origins는 정부의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헌신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Legal action/class action/compensation? (법적 조치/집단 소송/보상?)

 

비극적이게도 어떤 사람들은 하찮게 취급 받았으며, 몇몇은 잊혀졌고, 어떤 이들은 비참한 상황 속에 있다. 정부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상담이나 감정 표출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번 사과는 상처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으나, 금전적‧법적 피해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많은 이들에게 사과는 너무 늦었으며, 약간의 상담 기회만 있을 뿐이다.

 

총리와 야당 대표는 치유와 책임, 보상, 호주 국민, 명예에 대해 언급했다. “오로지 말만 모아 둔다면 이 모든 피해는 해결하지 못한다”고 Gillard 총리는 말했다. 그는 말에 합당한 행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은 파괴와 손실을 메울 만한 잘 짜여진 개선된 행동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어떤 이들에게 재결합되는 것은 더 심한 상처가 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원래 가족들이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재결합이란 명칭은 부적절하다. 즉, 그들은 결코 처음 상태로 결합될 수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에게 보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피해자 개개인의 입장 고려를 요구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조치’는 개개인의 다른 환경에 맞춰져야 한다.

 

이번 사과는 강제 입양 피해자를 범죄 피해자 수준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범위는 범죄 수준의 억압에서부터 불법 구금, 인권 침해, 아동 성범죄까지를 포함한다.

 

강제 입양 피해자의 추후 집단 소송은 후원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번 사과가 정의와 보상을 얻는 데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 여부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번 사과와 책임은 배상이 이루어졌을 때야만 의미가 있다.

 

이번 사과에서는 현재에서 미래까지 잠재적으로 진행 중인 세대 간의 영향은 물론, 이를 다루는 방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The Media(언론)

 

‘국가적 사과’는 국제적으로 뉴스를 만들어냈고, 트위터를 엄청나게 들썩거리게 했다.

 

“우리는 신중함과 대책이 없었던 과거와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적 사과는 “한 국가로서 양심을 찾기 위한 도덕적 성찰에서 나온 심오한 행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들어주기를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길라드 총리가 말했다.

 

그러나 사과가 끝나자마자, 국가적인 통합과 기능,강제 입양 문제에 대한 인정을 약속한 날답지 못하게 대중은 분리와 혼돈, 장애에 부딪혔다.

 

확실히, 호주 노동 정당(Labour leadership)의 주장은 한동안 이슈가 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과가 끝나자마자 사이먼 크린이 그들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 때, 언론의 관심은 미지급된 보상을 포함해 강제 입양의 중요하고 전국적인 이슈에서, 수용과 인정이 아닌 더 많은 소외와 실망을 만들어내는 거짓말, 부정확한 결정, 잘못된 추측으로 옮겨 갔다. (그 보상의 일부는 여전히 입양에 강력히 찬성하는 사람들의 전국적인 이해를 포함함)

 

아무도 언론과 특정 정치인들이 등 돌렸던 희생자들에게는 사과하지 않고, 호주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에만 사과했다. 미디어 왓치 프로그램은 권력에 도전하는 이야기들은 날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안들은 여러 의문을 낳는다. 지속적으로 퇴색(투명하게)되어가는 편견, 잘못된 아집, 호주인들이 진실과 마주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제 기능을 하는가? 어떤 권력자들의 심리적 장애나 사회적 필요는 사과를 억누르기를 바라는가? 호주인의 무의식에 일어난 일은 국가적 사과로 인해 관심이 돌려진 것인가? 언론은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화제 전환에 고의적으로 활용된 것일까?

 

놀랍게도, TV 뉴스는 아무것도 아닌 추측에 집중하고, 실망스러운 이벤트를 위해 일정을 바꾸고 시간을 늘렸다. ABC 뉴스는 7시 20분에 정기 뉴스를 시작하기 전, 7시부터 귀중한 20분을 부족한 이벤트에 할당했다. ‘사과’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일 같았다. 주요 방송 중 단 한 곳에서도 ‘사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느 정도 규모의 ‘권력에 대한 도전 아님’이라는 이야기가 강제 입양 이슈를 언론 상에서 익사시켜 버렸다.

 

위엄을 잃은 채 무시당하고, 언론 보도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떠나서, 우리는 넓은 사회적 이해와 수용을 받을 기회를 잃었다. 여기서 희생자들이 사기를 당했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닌 이야기’가 훨씬 중요해 보이기 때문에, 호주 국민들은 ‘국가적 사과’와 그 이슈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느낌 혹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무지를 계속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언론과 몇몇 정치인들은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다. Gillard와 Abbott는 외면 당했다. 강제 입양에대한 기자 회견은 커녕, 질문조차 없었다. 언론은 그들의 '제4부'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했다. 사과를 뒷받침하는 행동은 어디에 있었는가?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변화는 없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길라드 총리는 “호주 국민들은 역사 존중을 위해 싸우기로 한 당신의 결정에 감탄할 것입니다”라며, “방치의 시간은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러분 중 대부분이 여전히 자아 정체성과의 끊임없는 갈등, 불확실성, 상실감을 경험하며, 긴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국가적 사과’는 위대한 치유로써 환영받는다. 그러나, 호주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여전히 끔찍한 사실과 그들의 불의를 에 마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토크백(녹음실·방송실에서 관계자들끼리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시스템) 라디오는 몇몇 사람들이 (강제입양을) 범죄와 부도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능력함을 보여준다. 토크백 라디오에서 비평가들은 “우리는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Origins와 같은 조직은 극단주의자들이다. 강제 입양은 옳은, 유일한 결정이었고 계속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래된 “약자를 괴롭히는 오만함”은 일부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몇몇의 냉담한 가해자들은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낫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제 입양과 그와 관련된 무수한 범죄들이 옳다고 했던 과거 주류의 관습과 문화에 상관없이, 가해자들은 그것들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도덕성과 인류애의 근본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사람들이 바뀌어야 할 뿐이다.

 

슬프게도 국가적인 사과를 포함한 여러 사과들 후에도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상담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면과 악마화와 편견과 정신병과 조롱으로부터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이는 그들의 삶의 질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자기 결정권을 위협한다. Origins의 한 멤버가 말하기를, “‘사과’ 후에 내 양부모의 교회에 다니는 한 남자는 길에서 만났을 때 나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지나갔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 얼마나 고독한지를 고통스럽게 되새겼다. ‘사과’ 이후로 나에게 연락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나는 쉬기 위해서는 수면제를 먹어야만 한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며, 고용과 사회적 수용과 가족을 바라는 채로 남아있다. 어떤 목소리들은, 가족의 거절과 죄책감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용되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가? 국가적인 강제 입양 전시회의 준비와 관리 등등에 집단적인 관여가 존재하는 것은 어떤 가능성이 있나? 강제 입양 피해자들이 다른 피해자들을 상담해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은 어떤가?

 

교회, 병원, 상원 위원회는 영연방이 강제 입양에 영향 받은 모든 이들에게 사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며, 재정적인 책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논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중은 ‘모든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보다 더 높은 위엄이 타당하다고 했다. 또한 ‘국가적 사과’는 틀림없이 아주 작은 개인적 단계에서도 사과와 긍정적인 행동을 간접적으로 일으킬 것이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단계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변화들이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과거 교회의 입양 관행과 과정에서 (미혼모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범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단체의 장황한 설명은 보기에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전적으로 사과한 것으로 보인다. 8개 중 5개의 주 정부 또한 사과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몇몇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모른다. 마치 이렇게 하여 마법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처럼, 단체들이 단지 주장하고 내버려두게 하면 단체들은 미혼모들과 호주 사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병원, 교회, 자선사업가 등은 보상금을 내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가해자들은 살아남은 피해자들에게 전적으로 사과하고 정직하게 유익한, 진실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행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연결이 단절된 곳이든 연결이 고통스럽고 유해한 곳이든, 양 쪽에 대한 이해를 통해 구축된 긍정적인 연결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강제 입양에 대한 모든 사과가 그저 가식과 자기방어, 은폐, 계속된 해로운 태도와 몇몇 사람에 대해(특히 교회와 몇몇 가족에 속한) 계속될 행동의 대표가 아니라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학대 받거나 학대한 사람들이 개선된 행동을 할 것을 비도덕적으로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과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범법자들을 정의로 데려가는 것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일 할 뿐이다. 우리는 이해, 사과, 변화, 근거 없이 주장된 범죄에 대한 보상, 보상과 사회적 정의를 위한 싸움에의 참여가 그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라고 말한다. 미련하고 단편적인 문화주의자들의 다수가 그들의 잘못된 가치를 비도덕적이고 범죄인 강요를 통해 시행했고, 강제 입양이라는 결과를 낳았던 잔인했던 날들이 끝났다.

 

Origins는 구성에 있어 긍정적인 효과에 의지하며, ‘국가적 사과’를 새로운 시작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의 기록보다도, 우리는 계속해서 강제 입양 피해자들의 삶을 가능한 가장 좋게 고쳐줄 필요가 있다.

 

원문 출처 http://www.originsnsw.com/id80.html

]Wesley Rush (Adoptee) for Origins SPSA Inc

 

 

 

Christine’s Adoption Story – Newmarket, Ontario, 1982

1982, 14살 나는 임신을 했다. 엄마는 내 임신을 처음 눈치챘을 때, 우리가너무 늦기 전에 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의사와 진찰 예약을 잡았다.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한 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진찰을 받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진찰을 받게 되었고, 의사는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나의 임신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임신이었고 그것을해결하기에는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출산 전까지 시골에 계신 이모와 삼촌과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 일단 아기를 낳고 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나의 가족들의 계획은 그랬다.

이모가 아는 의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입양을 보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이를 키우고 싶은 내 열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기적이고, 미성숙하고, 애정이 없고, 잔인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조차도 아이에 불과했고, 나는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나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결정을 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고들 했다. 그 결정은 나의 엄마에게 달린 것이었다. 나는 약자였고, 엄마는 나의 보호자였기에, 엄마는 그 결정을 내릴 책임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엄마에게 그 결정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고 어리석은 실수가 나의 삶, 나의 미래를 망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납득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실은 엄마의 가족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들에게 불명예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할아버지와 나는 엄청나게 가까웠고, 모든 손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예쁨 받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내가 더 이상 손녀가 아니라고 했고, 나와 의절했다. 그 후 18년 동안 모든 가족 모임과 파티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무시했고, 투명인간 취급했다.

우리 엄마, 동생, 이모, 삼촌, 의사와 사회복지사들은 내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하며, 내가 줄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정을 찾아줘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나를 확신시켰고, 나도 스스로 확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로 그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15세가 되던 1982 10 6, 내 딸은 온타리오 뉴마켓의 요크 컨트리 병원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내가 내 아이를 만지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보는 것조차 금지했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를 보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나는 우리가 남은 삶을 함께 보내지 못할 것이라면, 적어도 함께할 수 있는 매 순간만큼은 가치 있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모는 내 편을 들어주었고 내게 아이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 후 4일 동안 나는 아이를 안고 흔들며 얼렀고, 뽀뽀하고 노래를 해주고 젖을 먹였다. 나는 아이에게 평생 동안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귀한 시간을 낭비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아이에게 꼭 붙어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왔지만, 손녀를 만나는 것은 거부했고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엄마가 실제로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마음을 바꿔서 우리 세 명이 함께 병원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딸 없이 병원을 떠나던 그날, 나는 죽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전의 나, 내가 믿어왔던 것, 내가 신뢰한 사람들은 그 즉시 없어져 버렸다. 내가 돌아갈 평범한 삶은 없었고, 나는 사라졌다.

나는 입양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 엄청난 감정적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내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해왔지만, 그들이 생모가 아닌 한 아무도 내가 경험한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입양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처이다. 선의에서 입양을 지지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딸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와 가족들은, 실제로는 딸들을 평생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게 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엄마의 삶에 영원히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 경험으로부터 평생 동안 결코 회복될 수 없다. 그녀는 깊고 가슴저린 공허함과 그녀의 삶에서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갈망과 함께 살아간다.

다른 아이를 가지는 것이 이 감정을 없애지는 못한다; 상처와 고통이 크게 자라도록 할 뿐이다. 그녀가 다른 아이와 함께 경험했던 각각의 중요한 순간들에는, 그녀가 잃어버린 아이와 함께하지 못한 모든 특별한 순간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슬픔이 따를 것이다. 엄마의 마음에는 그녀가 낳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각각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과 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지에 관계없이, 늘 빈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일부분은 항상 그녀의 아이와 떨어지는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그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아이를 안고 만지고 어르는 것을 그리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보낼 날은 그녀의 일평생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에게 그녀의 아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살펴달라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나는 밤 또한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십대의 임신을 장려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며,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가정과 사회가 십대 엄마들에게 '만약 그들이 아이를 걱정하고 사랑한다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옳은 일을 해야 하고,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하기보다는 '지지와 사랑, 그리고 보살핌'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사회는 십대 엄마들에게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정상가족, 번듯한 차와 명품들이 있는 큰 집임을 납득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십대 엄마들에게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감히 설득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실 아이들이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엄마와 아이 간의 유대는 끊어져서는 안 된다.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학대이자 고문이며, 둘 모두 이로 인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텅 빈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고, 행복한 결말은 있을 수 없다.

엄마와 아이의 재회가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쌓기 위해 많은 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또한 가족들에게 아이를 소개할 때, 편안하고 알맞은 역할을 찾으려 노력하면서 가족 모두 애써야 할 것이다.

내 딸 없이 퇴원하던 날은 내 죽음의 날이었다. 나는 결코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지 못했고, 그 후 21년 동안은 나는 유령처럼 살았다.

만약 당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딸에게 등돌리지 말라고 모든 부모에게 강력히 충고한다. 딸과 당신의 손주를 위해 그 자리에 있어주어라. 그들이함께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15살 소녀에게 아이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이를 키우게 하는 것보다 더 그녀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ontario-1982/

 

시다의 입양 이야기 브리티시컬럼비아 빅토리아, 1980

 

사람들이 우리의 “(아이를) 포기하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1980, 첫째 아이를 낳았을 당시에 나는 17살이었다. 나는 미혼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내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친척들이 알지 못하도록 부모님은 나를 웨이지홈(wage-home)’으로 보냈다. 내가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를 빼앗아갈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다.

 

오전 1시에 진통이 시작됐다. 부모님이 나를 페어필드 로드에 있는 빅토리아 종합병원에 데리고 가서 입원 신청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처럼 일반적인 진통과 출산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미혼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원한 다음 나는 이동식 침대에 눕혀져서 작은 창고로 보내졌다. 간호사는 나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진통이 있던 그날 밤의 첫 6시간 동안 그냥 자도록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진통이 심해서 잘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밤중에 딱 한 번 내 상태를 확인하러 왔고,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수면제를 더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나는 24시간 동안 깨어있었다. 여전히 진통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거나 마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레지던트가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데메롤(Demerol-진통제)을 줬지만, 오히려 구역질이 나고 정신이 멍했다.

 

오후 5시쯤 자궁이 완전히 넓어졌을 때, 나는 지난 18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한 채로 30시간 동안 깨어 있는 상태였다.

 

차가운 하얀 빛이 비치는 분만실로 이동되어 분만대에 줄로 묶인 채 눕혀졌다. 발 고정대에 발을 올린 채, 팔은 가죽줄로 탁자에 묶여있었다. 그 때는 이러한 조치가 내가 분만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내 아이를 세균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내 아이는 탯줄을 자르기 무섭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정말 잠깐도 볼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법적으로 여전히 내 아이였지만, 내 허락도 없이 아이를 빼앗아갔다. 입양시스템은 이렇게 내가 아이와의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게 해서 아이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나는 외음 봉합술을 받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외음 절개술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취는 이뤄지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힘이 없어서 걸을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아이를 봐도 되냐고 물어봐도 거절당할까 봐 묻지 못했다. 나 역시 아이를 볼 권리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간호사들은 자라고 말하며 독한 진정제를 투여했다.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 발을 끌며 조금은 걸을 수 있었고, 마침내 간호사에게 내 아들을 봐도 되냐고 물어봤다. 놀랍게도 그 간호사는 괜찮다고 말했다. 내 아이는 내 병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기방에 있었다. 의사가 나를 산부인과 병동이 아닌 부인과 병동에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고, 온몸의 멍과 10cm의 외음봉합 상처로 인해 아팠지만, 내 아이를 보기 위해 병동의 다른 한 쪽 끝까지 혼자 느리게 걸어갔다.

 

내 아이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본 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내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모성애였다. 모든 피, 육체와 정신에서 비롯되는 사랑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 아이가 태어날 때, 역시 엄마로써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본능, 두 몸에 한 영혼이 있는 유대감, 엄마와 아이가 공유하는 욕구, 내 아이와 함께 지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이 출산의 현실이며, 모든 여성이 겪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직접 알게된 사실이다.

 

나는 내 생명보다도 내 아이를 사랑했다. 내 마음 전부와 내 몸의 모든 세포로 아이를 사랑했고, 안아주고 꼭 껴안고 데리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기방에 있을 때, 간호사들은 내가 아이를 안지 못하도록 계속 지켜봤다. 나는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단 침입한 느낌이 들었고,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내 아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아이를 스스로 키우고 싶었지만 사회복지사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회복지사는 내가 입양서류와 출생신고서에 서명하도록 내 병실에 왔다.  내가 입양이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더니 사회복지사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입양하라고 압력을 줬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마음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하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세 달 전에 자기 아들을 입양시킨 경험이 있는 다른  고객한 명을 보냈다. 그 사람은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에 대해 극찬 했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어머니가 되기에 너무 어리고 내 아들은 정상적인 부모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출산으로 인한 호르몬 때문에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표했다. 내 부모님도 내 아이를 절대 집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나는 이미 부모님에게 가족의 수치였기 때문이다.

 

내가 울면서 아이가 태어난 지 며칠 후 서류에 서명했고, 주변의 모든 어른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내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고 (내 부모님의 눈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사회복지사 사무실에서 어떤 서류에 서명을 했던 그 사본을 받지 못했다.  그 곳에는 내 권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변호사가 없었다.  19세 미만의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사회 복지 혜택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복지사에게 내 아들이 (내가 그를 법적으로 찾아도 될 수 있는) 19세가 될 때 내가 찾으리라는 것을 입양한 부부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것뿐 이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에게 그 부부가 내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사회복지사는 내 부탁을 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편지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입양 후 여파의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당시 사회복지계가 비탄과 고통, 상실감 등 입양의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당시 아무도 나에게 그 결과들에 대해서 경고하지 않았다.  한 사회복지사가 내 소중한 아이 미샤엘(Michael, 별명은 미샤’)을 양부모가 병원에서 데리고 나갔다는 마지막 전화를 했을 때 나의 일부는 죽었다.

 

 (24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그 때의 눈물을 흘리고 그 순간들을 감정적으로 다시 느낀다. 내 아들과의 상봉은 억제된 기억과 감정을 드러나게 했다. 회상들은 참혹하고 나를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 고통과 기억들이 내가 아직도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느껴진다. 게다가 나는 내 소장이 죄어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신체적 영향 때문에 네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을 잃은 충격에 빠진 상태로 고등학교 3학년을 4개월만에 끝냈지만 약 8개월 후, 충격이 사라지자 내 아들을 잃은 것으로 인한 심한 고통에 대처하려2년 동안 노력했고 대학을 중퇴했다.

 

소울메이트였던 내 남자친구와 나에게 생긴 일로 인한 고통이 우리의 헤어짐의 원인이 됐다. 근친과 사별하는 것보다 100배 더 심한(내 아버지나 형제의 죽음과 같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고통과 상실감에 대해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다. 내 애인은 고통을 줄이려고 마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경우에는 몇 년 동안 아무렇게나 살고 나서 다행히 고통을 감추게 됐지만 내 아들과 상봉했을 때 그 고통이 다시 떠오를 줄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들을 법적으로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남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내 아들이 9살이나 10살 때쯤 되었을 때는 사립 탐정도 고용해 봤지만 아들을 찾지 못 했다.  그 동안 내 가슴에 있는 블랙홀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세 명 더 낳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어떤 아이도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알게 됐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것은 내 이야기다.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친 적이 없다.  그리워하기를 그만둔 적도 없다.  아들을 키우는 방법을 찾지 못한 내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지금 내 아들이 나에 대해 느낄 분노보다 더 심하다. 나는 결국 사회복지사들의 고객들을 위한 아기를 낳기 위해 조종, 이용당한18살의 어머니였다. 미성년자가 어른들에게 강요당해 성관계를 하는 것은 성적인 착취라고 한다. 그들이 이득을 얻기 위해서 미성년자의 생식력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생식적 착취(reproductive exploitation)!

 

젊은 여성들이 친부모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자기 아이를 위해서 입양이 제일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글들을 읽을 때, 그들에게 입양 과정을 거치면서 겪을 일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매일 그리고 매번 느끼는 이 고통을 내 원수에게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친어머니들이 자기를 포기하기로 한 선택에 대한 말을 할 때 내가 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은 없었다는 것이다.

 

상봉에 대해 덧붙이자면, 내 아들이 19세가 됐을 때 내 혼외 출산 죄에 대한 처벌이 끝나, 드디어 난 내 아들을 법적으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내 아들의 인생에서 나의 접근 금지가 끝났고 그를 찾았다. 그리고 내 아들의 눈을 봤을 때 우리 둘의 영혼은 서로를 알아봤고 나는 오래 전, 입양으로 인해 잃었던 내 아이를 알아봤다. 내 안에 있었던 장벽들이 무너지고 20년 동안 숨어 있었던 비탄이 다시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울기 시작했다. 건장하고 키가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내 아들은 내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나를 안아줬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은 우리 가족, 그가 파파로 부르는 친아버지와 상봉했다. 태어났을 때 내가 준 이름을 다시 사용하고 있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우리 둘이 법적으로 가족이 될 수 있게 미래에 내가 그를 입양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 아들이 나를 안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내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더 치유된다.

 

입양 관행은 일단 아기 엄마를 무너뜨려야만 아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다이앤 웰패이르 (Dian Wellfare), 오리진스사 (Origins, Inc.) 창립자는 말했다.

 

이는 2001 10 16일 내 아들과 상봉한 다음, 아들의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메일에서 잘 알 수 있다. “램지[Ramsay, 양부모가 내 아들에게 준 이름]는 어머니 한 명과 아버지 한 명이 있다램지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고 어떤 방식으로도 그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했다.

 

입양은 원해지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원해지지 않은 어머니들에 대한 문제다.

 

 원치않는 아이들을 버리고, 그들에게 영원히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무관심한 친어머니의 그림들을 만든 곳은 바로 아동복지기관이다. 아동복지기관은 이런 어머니들이 거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반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을 편리하게 한다. 사회정책개발자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은 친부모가족의 중요성을 쉽게 묵살하지 않기 때문에, 아동복지기관은 아이를 포기한 부모들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부모들과 다르게 묘사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입양을 보낸 친어머니는 다르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친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만큼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면 입양의 장점은 입양의 비극에 눌릴 것이기 때문이다. 입양부모들이 친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들의 죄책감은 어느 정도 줄어드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차지할 권리가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회도,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의 극심한 고통을 직시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 마가레트 맥도널드 로렌스 (Margaret McDonald Lawrence), 미국 입양 회의 첫 전국 대회에 한 연설, 워싱턴 D.C., 1979 5 4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victoria-bc-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