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s Adoption Story – Calgary, Alberta, 1960


잉그리드의 입양 이야기-캘거리 알버타(Calgary, Alberta), 1960

 우리는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다.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그들은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나에게서 바로 빼앗아갔다.

나는 14년 전 내 딸과 재회를 했고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세 아이의 할머니가 되었다. 내 딸은 크랜부르크(Cranbrook)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까지 4번 방문을 했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쓰고 전화통화를 한다. 우리는 훌륭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내 딸을 찾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뒤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50년대 말, 60년 대 초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몇은 대부분의 어린 미혼모들이 아기에 관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어린 미혼모들이 해야 하는 그 선택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선택권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 아기를 기르는 것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으로 없었으며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에 대해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의 의도는 부정적으로 혹은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아이를 포기했었어야만 했는지, 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몇몇의 입양아들은 어머니들이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느낀다. 나는 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분노는 여성들이 임신을 했을 때 거의 어떤 선택도 주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적 태도가 만연했던 시대로 향해야 한다. 많은 생모들 대부분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의 분노, 수치, 죄책감의 근본을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위한 길이다.

클라리사 핀콜라 에스트(Clarissa Pinkola Este)늑대들과 달리는 여자(Women Who Run With the Wolves)”라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여자들의 인생을 억압하는 것 들 중에서 가장 이야기 되지 않았던 것은 북미를 포함한 전세계에 있는 미혼모에 관한 것이다. 이 미혼모들은 이 한 세기 동안에만 문화적 관습에 의해 그들의 상태 혹은 그들의 아이들을 숨기도록, 심지어는 그들의 자식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난 받고 영향력을 박탈당한 시민으로서의 반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몇 세대 동안 여자들은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합법적인 인간이 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남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해왔다.”

이 인용문은 중세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이것은 20~30년 전 시대에 팽배했던 일반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여자를 소유했다. 남자는 결혼을 통해 아이를 소유했다. 만약 여자가 남자 이름의 허가 없이 임신을 했다면 그녀는 사회로부터 비난 받았고 아이는 합법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만 사회의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이도 같이 받은 것이다. 여자와 아이는 사회의 버림받은 자, 즉 고상하지 못한 피해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다. 더 심한 단어로 하면 창녀와 사생아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십대였을 때 나는 이 사고방식에 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관습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그런 방식이었다. 만약 여자가 규율을 어겼다면 그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복도에서 6개월 혹은 1년 간 비밀리 사라진 여자아이들에 관한 수군거림을 기억한다. “그 애는 임신했어.” “애를 낳으러 떠난 거야.” “그 여자아이는 형편없어.” “마을에 어느 누구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 부끄럽지만 나도 같이 험담을 했었다. 나는 그런 나쁜여자아이들에 비해 내 자신을 우월하다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여자아이들이 겪었을 고난, 고통,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아기의 운명에 관해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 여자아이나 아기를 향한 어떤 연민이나 동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쁜 여자아이들이었고 그들은 비난받을 만 했다. 나는 우월함을 느꼈고 착한 여자아이였다.

50, 60년대 고등학교 생활에서 (적어도 나의 작은 마을에서는) 나쁜 여자아이들은 갈 데까지 간 것으로 인식되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착한 여자아이들은 들키지 않았다. 그 때는 콘돔을 제외한 피임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넘어온 것을 자랑했고 그들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가 더 많은 훈장를 얻을수록 더욱 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나쁜 평판을 받았다. 이중적인 기준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여자아이를 술에 취하게 하거나 그녀가 넘어오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감정 협박을 함으로써, 그들의 데이트 상대 혹은 여자친구에게 가차없이 섹스를 강요했던 남자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데이트 강간도 있었다. 데이트 강간은 정확히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흔한 것이었다. 그와 홀로 있었던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남자친구와 키스한 것은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잘못이었다 등등. 남자아이들은 비난 받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책임이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품위 있고 도덕적인 젊은 남자들을 옹호하자면, 여자아이가 임신을 했을 때 책임감을 느끼고 옳은일을 했던 몇몇 남자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그들은 그 여자아이와 결혼하였다. 이런 결혼을 샷 건(shot-gun, 속도위반)” 결혼이라고 불렀다. 몇몇의 남자아이들은 옳은 일을 하고 여자아이와 결혼하도록 그들의 부모나 여자아이의 부모에게 강요 받았다. 이것은 결혼의 좋은 기반은 아니었다.

, 사회는 남자아이들의 본능은 허락했지만 여자아이들은 결혼 할 때가지 처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그저 섹스를 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심지어 섹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착한 여자아이들은 섹스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식에서 맹세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하루 밤 만에 성()의 요정으로 변신해야 했다. 따라서, 우리 중 몇몇은 감정 협박에 굴복했고, 몇몇은 강간으로 고통 받았고, 몇몇은 술에 취해 이용당했고, 그리고 몇몇은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사랑스러운 품을 저항할 수 없었다. 흔한 수단은 네가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했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은 사람은 우리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6살 때 임신을 하였다. 공포 중의 공포, 나는 그들중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알다시피, 매춘부, 부랑자, 창녀, 쉬운 여자가 된 것이다.

나는 수치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내 자신, 부모님에게 수치가 되었으며 평판 또한 떨어졌다. 또한 가문의 이름에 수치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이 나와 의절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복 동생이 있다는 생각에 신나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는 부정한 여자기 때문에 그 아이와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비서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11학년이었는데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고 그 곳에서 속기사와 접대원의 일을 얻었다. 나는 나이를 속였고 혼자 살았다. 일하고 돈을 모으면서 고향 사람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까봐 늘 두려웠고 너무 수치스러웠다.

 나는 캘거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한 충분한 돈을 모았고 사회 복지 센터에 연락을 하였다. 나는 숙식의 대가로 몇몇 가정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크레체 주(The Providence Creche)라는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가톨릭 시설에 배정되었다. 이곳에서 우리의 수치심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외출할 때마다 낄 결혼 반지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익명을 사용해야 했다. 나는 케이티 프루든(Kathy Pruden)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내 생각에는 프루든이라는 이름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이름이 나의 더러움을 없애고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줄 것처럼 말이다. 미혼모 시설의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도시 밖 출신이었고 아무로 서로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숨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을 숨기도록 지시 받았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슬픔과 혼란을 느꼈다. 우리는 수녀들에게 이 일이 끝난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잊으라고 했다. 아무도 우리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도 겪을 상실감, 슬픔,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진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우리는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었다.

나는 한밤중에 진통을 느꼈고 수녀 한 명을 깨워야 했다. 그녀는 홀리 크로스(Holy Cross)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고 나 혼자 두고 떠났다. 출산하는 동안 사무적이고 냉담한 직원들이 나를 돌보았고 내 딸이 태어나자마자 빼앗아갔다. 내 곁에서 정신적인 지지나 친절을 보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간호사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아기를 데려다주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에게는 미소와 부드러운 속삭임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침대를 지날 때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내 아기를 볼 수 있냐고 질문했고 그들은 내가 딸을 포기했으니 아기를 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차갑게 대답하였다. (나는) 복도를 서성이며 내 딸을 알아볼 수 있을까 바라며 육아실을 훔쳐보았으나 눈에 띄자마자 쫓겨나곤 했다.

내가 병원을 떠나기 바로 전 아기를 볼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그들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15분동안만 허락 해주었다. 마침내 내 딸을 안아볼 수 있었고, 간호사가 갑자기 들어와 아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나는 내 딸의 작고 예쁜 얼굴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를 찾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입양으로 내 딸을 포기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변했으며 그 일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슬픔은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는 다양한 자해행동으로 나타났다.

수치심은 나의 자존감에 영향을 주었다. 수치심은 내가 모든 것을 부인하게 했으며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평판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내 가문의 이름을 보호해야 했다. 나는 이 깊고 어두운 비밀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나는 상실감과 슬픔을 30년 동안 내 자신 속에 숨겨왔다. 비극적인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던 그 시대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시대와 사고방식이 변화해왔다. 사회는 더 인도적으로 변화했다. 미혼모들은 나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선택하기 힘들지라도 미혼모들에게 선택권이 있다. 여자들은 슬픔의 과정을 겪을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인정받고 허락되었다. 미혼모들은 제도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오늘날의 많은 어머니들이 몇몇의 우리가 겪었던 것을 겪지 않는 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그러나 이런 이슈에 대한 일반 대중들과 특히 입양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이 그것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견해에 따라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규율에 기초하여 그 시대의 사회 사고방식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우리는 규율을 어긴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치유를 위한 한 방법이다.

 

추신:

30년이 지나고 요청을 하자, 알버타 주정부 공공복지부의 어린이 복지 지부로부터 포기 신청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딸이 태어난 뒤 겨우 5일이 지난 후 병원을 떠나면서 신청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문 : http://www.originscanada.org/resources/mothers-stories-adoption-across-canada/adoption-calgary-alberta-1960/